필리핀 업체 S사가 2023년 7월 ‘출국 전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에 파견될 계절노동자 수십 명을 강당에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S사 직원들은 “돈을 빌렸다는 계약서에 서명하라”며 허위 대부약정서 서명을 강요했고 거부할 경우 출국이 불가능하다고 협박했다. 실제 대출은 없었지만 이미 건강검진·농업실습 등 명목으로 상당한 비용을 낸 노동자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한국인 유명 브로커 ‘미스터 홍’은 필리핀 현지에 S사를 설립하고 기업처럼 움직였다. 이 회사를 통해 면접부터 교육과 계약 강요, 출국 관리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일사불란하게 관리했다.
이 때문에 출국에 성공한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미스터 홍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은행 계좌 개설은 한국 입국 당일 강제로 이뤄졌다. 통장 비밀번호를 S사 직원에게 넘기도록 한 뒤 매달 최대 75만 원까지 자동이체로 갈취했다. 일부 피해자의 경우 통장 비밀번호까지 받아내 임금이 들어오기 전 미리 인출해가는 일도 발생했다. 브로커나 송출 수수료의 존재는 비밀로 부쳐졌다. 기업화된 착취 구조가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29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브로커들에 의한 외국인 노동자의 구조적 착취는 공공 영역 안에서조차 벌어지고 있다. 브로커 미스터 홍은 필리핀 지자체와의 연결을 통해 현지 노동자들의 이력서를 수집한 뒤 자신이 대표로 있는 송출기업 ‘S사’를 거점 삼아 면접·교육·파견까지 모든 절차를 통제해왔다. 해당 노동자들은 충북 괴산군과 경기 안성시 같은 국내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공형 계절근로제’ 구조 안으로 유입됐다. 계절근로자 프로그램은 법무부가 파종·수확기 단기간 발생하는 농어촌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2007년부터 운영 중인 제도다. 올해는 총 9만 5700명이 배정돼 규모가 전년 대비 41% 늘었다.
임금을 원활히 갈취하지 못한 경우에는 또 다른 협박이 뒤따랐다. 돈을 갚지 않으면 한국에서의 근로를 준비 중인 다른 가족의 출국도 막겠다는 압박이 대표적이다. 수수료를 내지 않으면 100만 페소(약 2400만 원)의 벌금을 물리고 친척들이 형사처벌을 받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협박도 이어졌다. 탈출한 노동자에게는 신상 공개와 명예훼손, 허위 고소 같은 2차 피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 S사 통역 직원은 온라인상에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며 “이 사람은 마약을 했고, 돈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위치를 알려주면 500만 원 현상금을 주겠다”는 사적 수배글도 게시됐다. 허위 고소에 따라 일부 피해자가 실제 경찰 조사를 받는 상황도 생겨났다.
이런 수법을 반복해온 브로커들에 대한 처벌은 여전히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다. 미스터 홍은 지난해 말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은 뒤 지금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 다른 유명 브로커 ‘미스터 김’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2022년부터 거창·양구·완도 등지에서 계절근로자들을 모집한 그는 매달 일정액의 임금을 송출 수수료 명목으로 떼어가는 행태를 반복해왔다. 피해자들의 형사고소 이후에도 수사에 진척이 없는 가운데 동일한 방식으로 활동 중이다. 고기복 모두를위한이주인권문화센터 대표는 “한 번 당한 뒤에는 브로커들의 수법이 점점 더 교묘하고 은밀해진다”며 “서로의 수법을 모방하며 법망을 피해간다”고 말했다. 피해 경험이 있는 이주노동자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현지 브로커로 전환돼 또 다른 희생양을 모집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알려진 착취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산재보험 미가입이나 임금 체불 같은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외부에 알리기를 주저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특성 때문이다. 류지호 의정부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상담팀장은 “사업장 내에서의 문제를 알리면 고용주들에게 ‘문제 노동자’로 낙인찍혀 재입국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퍼져 있다”면서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계속 한국에 올 수 있다면 감수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국에 길어야 수 개월 머무르는 계절노동자들의 경우 대부분 휴대폰 개통조차 하지 않아 외부와의 접촉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피해를 인지하더라도 고용주나 브로커의 협박에 대응할 수단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귀국 후에는 법적 조치를 이어갈 동력도 사라져 사건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 같은 현실이 피해 구조와 사후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전언이다.
인권단체들은 반복되는 이주노동자 착취를 막기 위해 제도적 대응과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2023년 1월 시행된 인신매매방지법에 따라 지자체가 설치해야 할 ‘지역권익보호기관’은 아직도 마련되지 않았다. 현재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발급 중인 ‘인신매매 피해자 확인서’는 대부분 성매매 사건에 집중돼 노동착취 피해자 지원은 사실상 공백 상태다. 이소아 법무법인 동행 변호사는 “인신매매는 국제법상 세계주의가 적용돼 국경과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는 범죄지만 국내 수사기관은 ‘해외 계약은 관할 밖’이라며 심각성을 축소하고 사실상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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