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글씨가 흐릿하고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네요.”
40~50대 중반을 넘긴 환자들이 안과를 찾을 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다. 상당수 환자들이 이러한 증상을 단순한 노안의 시작으로 여긴다. 그런데 진료를 받은 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원인 질환이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뇨망막병증이다. 시력저하의 원인이 노화가 아니라 혈당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접한 환자들은 적잖이 놀라곤 한다.
당뇨망막병증은 혈당이 높아진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눈 속 얇은 신경층인 망막의 미세혈관 및 신경조직이 손상되는 병이다. 고혈당은 온몸의 미세혈관을 공격한다. 특히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고 뇌로 전달하는 망막에서는 미세혈관 손상에 따른 부종 및 망막 신경조직 손상이 시력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학계에 따르면 국내 당뇨 환자의 약 15~30%는 당뇨망막병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제1형 당뇨병 진단 후 5년 이내, 제2형 당뇨병의 경우 진단과 동시에 망막 검사를 시행해야 하는 이유다. 증상이 없더라도 반드시 매년 안과 검진을 받는 것이 좋다.
당뇨망막병증은 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비증식성 단계’와 ‘증식성 단계’로 나뉜다. 초기 비증식성 단계에는 망막 모세혈관이 손상되고 미세출혈이 생긴다. 문제는 망막 중심부에서 중심시력을 담당하는 황반 부위가 붓는 '황반부종'이 발생하지 않으면 대다수 환자들이 특별한 불편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혈당이 높은 상태가 지속되면 망막이 산소 부족에 대응해 표면에 새로운 혈관을 만들어 내는데, 이 혈관은 매우 약하기 때문에 터지기 쉽다. 견인막을 만들어 유리체 출혈이나 망막박리를 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황반부종이 발생하면 글씨가 뿌옇게 보이고 시력이 떨어지면서 중심 시야가 왜곡될 수 있다. 많은 환자들은 이런 증상이 나타나도 노안이라고 여겨 방치하다가 안경이나 렌즈를 바꿔도 시력이 개선되지 않는 등 상당히 진행된 단계에 이르러서야 병원을 찾는다.
증식당뇨망막병증은 레이저 광응고 치료나 신생혈관을 억제하는 약물주사 치료를 통해 신생혈관으로 인한 구조적 합병증과 시력 손상을 예방할 수 있다. 진단이 늦어질수록 유리체 출혈, 망막박리 등으로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거나 시력 회복이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조기 발견과 치료가 매우 중요하다. 황반부종은 대부분 약물주사로 치료한다. 재발이 흔해 반복적인 주사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많다.
당뇨망막병증의 가장 중요한 위험인자는 고혈당이고 고혈압, 고지혈증, 흡연 등도 꼽을 수 있다. 흡연은 혈관을 좁히고 산화 스트레스를 높여 망막 혈관의 손상을 가속화할 수 있으므로 당뇨 망막병증 환자에게 금연은 더욱 중요하다. 규칙적인 운동과 식이조절로 혈당·혈압·지질 수치를 적절히 관리하는 것은 대부분의 만성질환을 예방하는 동시에 망막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이다.
안과에서는 망막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기본적인 검사로 안저사진을 촬영한다. 필요에 따라 형광안저촬영과 망막 구조를 세밀히 살피는 단층촬영을 통해 병의 진행 상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세 출혈, 부종, 신생혈관 생성 여부를 조기에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뇨망막병증은 녹내장, 황반변성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주요 실명 질환으로 지목된다. 그럼에도 천천히 진행되는 질병의 특성으로 인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환자가 시력 이상을 느낄 때는 이미 치료 시기가 늦어진 경우가 많다. 특히 한쪽 눈의 망막 손상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하면 다른 눈의 시력 저하를 일상 생활에서 환자 스스로 인지하기 어렵다. 집에서 한쪽 눈씩 가린 채 시력에 차이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이상이 느껴지면 즉시 안과를 찾아야 한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냥이라는 말처럼 눈 건강은 삶의 질과 직결된다. 당뇨병이 있다면 혈당 관리를 위해 정기적으로 내과를 방문하는 것 만큼이나 망막 건강 관리에 유의해야 한다. 별다른 증상이 없더라도 매년 안과 검진을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중한 시력을 지켜나가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정기 검진과 적극적인 혈당 관리에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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