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원 선거 참패에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던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입지가 급속히 좁아지고 있다. ‘버티기’ 명분이던 미일 관세 협상까지 타결되면서 이르면 이달 중 ‘질서 있는 퇴진’에 나설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이르면 9월 총리 선출 절차가 이뤄질 수 있어 일본 정국이 시계 제로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3일 요미우리신문은 미일 관세 협상 타결을 계기로 이시바 총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이르면 이달 중 사퇴를 공식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이 24일 귀국한 뒤 협상 관련 보고를 받는 이시바 총리가 미일 정상회담 등 향후 정치 일정을 고려해 퇴진 시점을 조율할 것이라는 전망에서다.
같은 날 마이니치신문도 이시바 총리가 8월 말까지 퇴진 의사를 굳히고 이를 주변에 알렸다고 전했다. 당내 압박의 강도에 따라 퇴진 시점은 달라질 수 있지만 자민당이 내부적으로 참의원 선거 패인을 검증하는 간담회를 퇴진 수순에 들어가는 타이밍으로 삼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자민당은 29일 중의원·참의원 양원 의원 총회를 열어 선거 결과 분석에 착수할 방침이다. 총회는 당초 31일 예정이었지만 퇴진 요구 여론에 따라 앞당겨졌다.
이시바 총리는 일단 퇴진설을 부인했다. 그는 이날 기시다 후미오, 스가 요시히데, 아소 다로 등 전직 총리들과 회동한 직후 기자들에게 “거취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직 총리와 전직 총리 3인이 한자리에 모인 이례적 회동을 두고 언론들은 당내 기반이 약한 이시바가 원로들의 힘을 빌려 당내 반발을 누그러뜨리려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앞서 이시바 총리는 20일 참의원 선거 참패 직후 책임론이 커지자 미일 관세 협상과 고물가 대응 등을 들어 총리직 유지를 시사해왔다. 일본 언론들은 이시바 총리가 명분으로 내세운 미일 관세 협상이 타결된 데다 당내 퇴진론이 거세지며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미 정치권의 관심은 차기 총리로 옮겨 가고 있다. 현지 언론 보도대로 이시바 총리가 이달 퇴진하면 자민당은 총재 선거를 거쳐 이르면 9월 총리 지명 투표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통신은 자민당이 이미 새 총재 선거 준비에 돌입했다고도 보도했다. 차기 총리 후보로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이 가장 유력하다. 지난 21~22일 요미우리신문이 차기 총리 선호도를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26%로 1위를 차지했고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상이 22%로 뒤를 이었다. 이시바 총리는 8%에 그쳤다. 다카이치는 극우 정치인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바 있으며 고이즈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다만 자민당이 총재를 선출하더라도 여소야대 구도에서 총리 지명 통과는 쉽지 않다. 총리 지명은 중·참의원 투표를 거치는데 현재 여당은 중의원에서도 과반에 못 미친다. 일부 야당의 협조 없이는 총리 선출 자체가 불확실하다.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여론도 적지 않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7%는 ‘야당 중심 정권 교체’를, 35%는 ‘자민당 중심 정권 유지’를 원한다고 답했다. 다만 야당 간 정치적 결속력이 약해 정권 교체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정국이 시계 제로에 빠진 가운데 정치 불확실성 확대로 금융시장도 출렁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일본 재무성이 발행한 40년 만기 국채의 입찰률이 2.13배로 2011년 8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곤도 히데키 간포생명보험 시장운용부 과장은 “차기 총리가 누구일지 등 관련 보도가 정리되지 않은 채 입찰에 돌입하면서 관망세가 강해졌다”고 짚었다. 이날 10년물 국채금리도 장중 1.60%까지 오르며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0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긴축 통화정책 지지자인 이시바 총리 퇴진설이 부각되며 차기 정권의 재정지출 확대 가능성이 우려를 키웠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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