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미 치료제로 알려진 ‘스코폴라민’이 피해자의 기억을 흐리게 하고 판단력을 흐려지게 만든다는 위험한 특성 탓에 범죄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악마의 숨결’로 불리는 이 약물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이며, 새로운 형태의 강력 범죄 수단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7일(현지시간) 더선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현재 스코폴라민이 영국 내 범죄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스코폴라민은 원래 구역질이나 멀미 완화를 위해 쓰이는 일반 의약품으로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을 억제해 메스꺼움을 줄이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이 물질은 기억과 학습, 운동조절과 관련된 뇌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처방 없이 고용량을 복용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디파 캄다르 영국 킹스턴대학교 약학과 선임 강사는 “스코폴라민은 기억 형성과 회상 시스템을 방해해서 일시적이지만 심각한 기억 상실을 일으킬 수 있다”며 “이것이 범죄에 악용되는 핵심 이유”라고 밝혔다.
‘악마의 숨결’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도 피해자의 기억을 지워 스스로 판단하거나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캄다르는 “피해자들은 꿈을 꾸는 듯한 느낌과 순종적인 상태를 경험하며, 가해자에게 저항하거나 사건을 기억할 수조차 없다”며 “이것이 바로 이 약물을 그토록 악명높게 만드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 물질은 체내에서 빠르게 흡수된 뒤 12시간 이내 배출되므로 통상적인 약물 검사를 통해선 확인이 어렵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10㎎ 이하의 소량으로도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다.
중독 증상으로는 맥박 증가, 가슴 두근거림, 입안 건조, 안면 홍조, 시야 흐림, 방향 감각 상실, 착란, 졸음 및 환각 등이 보고된다.
캄다르는“정체불명의 음료를 마시거나 낯선 사람과 접촉한 후 이런 증상들을 경험한다면 즉시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라”고 조언했다.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이 약물로 사람들을 조종해 강도 행각을 벌인 3명이 체포된 바 있다. 2019년 영국에서도 아일랜드 출신 댄서 에이드리언 머피가 스코폴라민에 중독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해당 약물이 연루된 첫 번째 살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지난달에는 30세 여성 데보라 오스카가 런던 지하철 안에서 해당 약물에 노출됐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애비 우드역에서 출발한 엘리자베스 라인을 타고 있었고, 한 여성이 신문을 흔드는 바람에 얼굴로 공기가 불어오자 기이한 감각과 함께 졸음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데보라는 이전에 인터넷에서 접했던 ‘악마의 숨결’ 관련 영상을 떠올리고 정신을 가다듬은 뒤, 열차에서 내려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악마의 숨결’ 관련 사건은 콜롬비아 등 남미 지역에서 주로 보고된다. 해당 지역에서 ‘부룬당가’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 약물은 다수의 강도와 성범죄 사건과 연관돼 있다.
2017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휴가를 보내던 47세 캐나다인이 버스터미널 인근에서 범행을 당한 후, 약 12시간 동안의 기억을 잃은 채 방황했던 사례도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현금 250달러와 스마트폰을 도난당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신체적 외상은 없었지만 혼란과 방향 상실, 집중력 저하를 겪었다고 증언했다.
캐나다로 돌아간 뒤 병원을 찾은 그는 약물 검사를 받았으나 모든 항목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고, 의료진은 “스코폴라민 중독이 의심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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