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KTX-산천의 탄생으로 전 세계 네번째 고속철도 기술을 보유한 한국의 철도 산업이 이제는 한국형 열차제어시스템(Korean Train Control System Level-2·KTCS-2) 개발로 철도산업의 밸류체인을 완성했다. KTX가 신체라면 두뇌의 역할을 하는 열차 제어시스템까지 국내 기술을 확보해 철도 자율주행의 문도 열게 된 셈이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철도 관련 역사가 깊은 유럽의 표준이 기술 장벽으로 작용해 열차제어시스템 개발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철도공단을 중심으로 현대로템 등 민관이 힘을 합쳐 수입에 의존해 오던 열차제어시스템을 국내 기술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우즈베키스탄 차량 수출로 해외 시장에서도 성과를 내기 시작한 국내 고속철도 산업은 KTCS-2에 이어 KTCS-3 개발에도 성공하며 차량과 제어시스템 등 철도 산업 전반으로 해외 시장의 영역을 넓힐 채비를 마쳤다.
◇차량부터 시스템까지 국산화 성공한 국내 고속철도=대한민국 고속철도의 역사는 1992년 6월 경부 고속철도 건설이 추진되면서 시작됐다. 1994년 프랑스의 고속차량 제작 업체인 알스톰(Alstom)과 300km/h급 고속차량 도입 및 기술 이전 계약을 맺은 이후 10년이 지난 2004년 경부고속선 개통과 함께 한국의 고속철도 KTX가 전국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후부터는 ‘국산화’와의 전쟁이었다. 프랑스의 기술 이전에는 정작 고속차량 핵심 부품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철도공단, 현대로템과 현대중공업, 철도기술연구원 등 산·학·연이 머리를 맞댄 끝에 2010년 KTX-산천이 탄생했다. 차체, 대차, 견인 전동기 등 핵심 부품의 국산화율이 80퍼센트에 달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고속철도 기술을 확보한 나라의 반열에 올랐다. 그럼에도 “한국은 전 세계 철도 시스템의 전시장"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50km/h이상 초고속 운행을 제어하는 열차제어시스템을 외국산인 ATC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열차제어시스템은 열차의 안전한 운행을 확보하는 철도신호 분야의 핵심 기술이다. 그러나 고속철도 도입 당시 우리나라는 기술력이 부족해 ATC라 부르는 외국산 열차제어시스템을 수입해 운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 종속의 대가는 과도한 유지 비용으로 돌아왔다. 시스템 변경을 할 때는 외국 기업의 일정까지 따라야 하는 문제가 뒤따랐다. 이러한 배경 속에 국가연구개발(R&D)을 통해 한국형 열차제어시스템 KTCS-2가 개발됐다.
◇KTCS-2로 1조 2149억 원 절감…독자적 기술 자립 완성=KTCS-2의 개발은 한국은 전 세계 철도신호 시스템의 전시장이라는 오명을 벗고 독자적인 기술 자립의 토대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KTCS-2는 국가철도공단이 주관해 지난 2014년 12월에 시작해 2018년 6월까지 연구개발비 총 339억 원을 투입해 만든 제품으로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을 비롯한 13개 민․관 기업이 참여했다. 이후 KTCS-2는 2018년 7월부터 2022년 4월까지 전라선(익산∼여수EXPO, 180km 구간)에서 시범사업을 시행한 후 그 안전성을 입증했고 이제 고속철도 노선에 확대 설치될 준비를 하고 있다. 국가철도공단은 KTCS-2를 2025년부터 경부고속선을 시작으로 2028년까지 전체 고속철도 노선에 우선 적용하고 이후 일반철도까지 확대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KTCS-2의 도입은 수입대체 효과와 수송력 증대를 비롯한 다양한 부분에서 기대 효과가 크다. 현재 고속철도에 적용된 외국산 신호시스템인 ATC 개량 비용 대비 약 1조 2149억 원을 절감할 수 있어 수입대체 효과를 통해 경제성이 크게 향상된다. 또 열차 간 운행 간격 단축으로 열차 수송력 또한 1.2배 이상 증가한다. 무선통신을 통한 실시간 정보 전송으로 열차 간 운행 간격이 기존 ATC의 10.5km와 비교해 KTCS-2는 8.1km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국가철도 공단 관계자는 “수송력 증대로 같은 선로에서 더 많은 열차가 운행하게 되면 늘어나는 철도 이용객을 더 원활하게 수용할 수 있다”며 “이는 국민에게 더욱 향상된 서비스와 편의를 제공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전성 부분에서도 기대 효과가 크다. 시스템별 위험 요인을 산출해 비교한 결과 KTCS-2는 ATC 대비 고장 발생확률이 5.81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KTCS-2 해외서도 호평, 해외 진출 가능성 열렸다= KTCS-2는 단지 한국 철도 신호시스템의 혁신에 그치지 않는다. 이 시스템은 K-철도 기술의 해외 진출 가능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발판이기도 하다. R&D 단계부터 유럽에서 사용하는 상호운영 열차제어시스템(ETCS·European Train Control System)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된 KTCS-2는 열차가 국경을 넘어 오가더라도 신호시스템이 달라 운행이 제한되는 비효율적인 상황을 원천적으로 방지했다. 국내와 해외의 제도와 시스템을 동시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고속철도 등 신규 철도 인프라 수요가 급증하는 해외 철도시장에서 K-철도의 기술력을 확산시키는 교두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제 지난해 9월과 10월 이성해 국가철도공단 이사장은 한국에서 열린 ‘글로벌 인프라 협력 컨퍼런스(GICC)’와 UAE에서 열린 ‘글로벌 레일 2024’에 참석해 KTCS-2를 통해 K-철도 기술의 우수성을 홍보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기대 효과를 가진 KTCS-2는 해외 철도관계자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이성해 국가철도공단 이사장은 이와 관련, “국가연구개발(R&D)을 통해 개발된 KTCS-2의 도입은 해외에 의존해 온 신호시스템의 국산화를 통해 철도 기술의 자립을 완성했다는 점이 큰 의미가 있다”며 “KTCS-2는 향후 글로벌시장에 K-철도 기술의 역량을 보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도 차량과 열차제어시스템의 패키지 수출 가능성이 커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 철도 전문가는 “동남아시아에서 광역철도 인프라가 빠르게 확장 중이고 경제성 측면에서 우위에있는 한국의 철도 기술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며 “2028년까지 국내 고속철도망에 구축을 완료하고 보완점을 개선한다면 해외 수출도 본격화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이 원전 수주를 따낸 체코에서도 국내 고속 철도 기술에 관심이 많다. 주한 체코대사는 최근 “체코 정부가 체코~독일 간 고속철도 사업을 추진 중이어서 한국의 KTX에도 관심이 많다”고 언론을 통해 밝힌 바 있다.
◇KTCS-2 넘어 KTCS-3로=KTCS-3는 KTCS-2의 후속 모델로, 차세대 기술을 적용해 더욱 고도화된 시스템이다. 특히 KTCS-3는 기존 열차 위치 검지 방식인 궤도회로 대신 차량 자체의 지상장치(RBC)를 통해 '열차의 위치 정보'를 실시간 전송할 수 있다. 신호기 등 지상설비를 대폭 축소할 수 있어 건설·유지보수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 또 기관사의 조작 화면 터치 한 번으로 열차를 출발시킬 수 있고 선로 상태(속도 제한구역)에 따라 최적의 가·감속 운행을 자동으로 반복해 정해진 위치에 정차한다. 이를 통해 기관사 등 사람의 실수 등을 예방하고 열차 간 여유 간격을 최소화한 고밀도 운행도 가능하다. 이성해 국가철도공단 이사장은 “KTCS-2에 그치지 않고 열차자동화운전(ATO) 기능을 탑재한 KTCS-3 등 지속적인 R&D를 통해 K-철도 기술을 고도화해 나갈 것”이라며 "단순한 기술혁신을 넘어 경제성, 효율성, 안전성을 고루 갖춘 미래형 철도신호 시스템을 통해 K-철도의 미래를 이끌 핵심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할 준비를 마쳤다"고 설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