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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한 통으로 행정처분…효력 있을까?[안성훈 변호사의 ‘행정법 파보기’]

안성훈 법무법인 법승 변호사


A씨는 평범한 어느 날 오후, 화성시로부터 예상치 못한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자신이 버린 폐기물을 치우라’는 조치 명령이었다. A씨는 당황스러웠다. 이런 중요한 행정명령을 마치 친구와 주고받는 일상적인 문자 메시지처럼 보내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시 당국의 입장은 달랐다. 담당 공무원들은 이미 여러 차례 같은 내용을 전자우편으로 발송했으나 A씨가 이를 무시했고, 따라서 문자 메시지로 송달하는 것도 충분히 적법한 절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간편한 소통 수단이 국가기관의 공식적인 행정처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까?

이 같은 논란에 대해 대법원은 지난 2023년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대법원 2024. 5. 9. 선고 2023도3914 판결). 판결은 단순히 개별 사건의 해결을 넘어서, 디지털 시대 행정처분의 송달 방식에 대한 중요한 법적 원칙을 확립한 의미를 갖는다.

행정처분의 효력은 그 내용이 적법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다. 처분의 내용 만큼이나 ‘어떻게’ 처분을 하느냐, 즉 절차적 적법성이 매우 중요하다. 행정절차법 제24조 제1항은 “행정청은 처분을 하는 경우에는 문서로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행정처분이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행위이기 때문에 전달 방식에서도 신중함과 정확성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자 메시지는 법적으로 어떤 지위를 갖는가?

대법원은 문자메시지가 ‘전자문서’에 해당한다고 명확히 인정했다. 전자문서 및 전자거래 기본법에 따르면 전자문서도 서면문서와 동등한 효력을 갖는다. 따라서 문자메시지라는 형식 자체만으로 그 효력이 부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전자문서가 행정처분의 문서로서 유효하려면 반드시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행정절차법 제24조 제1항 단서 및 제1호) 이는 국민이 자신의 권익에 영향을 미치는 행정처분을 어떤 방식으로 받을지에 대해 선택권을 가져야 한다는 민주적 원칙을 반영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A씨가 과거에 같은 내용의 폐기물 조치명령을 전자우편으로 받고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행정청 입장에서는 “이미 전자적 방식의 문서 수신에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에 전자우편 송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송달에 동의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묵인을 단순하게 동의로 볼 수 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법은 모든 상황을 경직된 기준으로 규율하지는 않는다. 행정절차법 제24조 제2항은 예외적 상황을 인정하고 있다. '공공의 안전 또는 복리를 위하여 긴급히 처분을 할 필요가 있거나 사안이 경미한 경우'에는 말, 전화, 휴대전화를 이용한 문자전송, 팩스 또는 전자우편 등 문서가 아닌 방법으로도 처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 규정의 적용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 사안에서 대법원은 그러한 긴급한 사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폐기물 치우라는 조치명령이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거나 즉각적인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긴급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일반적인 행정처분에서 이러한 긴급 사정을 인정받기는 어렵다.

이 같은 법원의 엄격한 기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 가수 유승준씨의 병역 관련 비자 발급 거부 사건에서도 법원은 ‘전화 통보’ 방식으로 이루어진 행정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는 행정처분의 송달 방식에 대한 법원의 일관된 원칙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는 전례 없는 디지털 전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부 역시 ‘디지털 정부’를 표방하며 각종 행정 서비스의 전자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온라인을 통한 민원 처리, 모바일을 활용한 각종 신청 서비스, AI를 활용한 행정 업무 등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국민들은 더 빠르고 편리하게 행정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정부는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대면 행정 서비스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하지만 효율성과 편의성만을 추구할 수는 없다. 특히 행정 처분과 같이 국민의 권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자 메시지나 간단한 온라인 알림으로 중요한 법적 의무나 권리가 결정된다면, 이는 적법절차의 원칙에 어긋날 수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디지털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을 재확인한 의미를 갖는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편리함과 효율성은 분명 중요하지만, 그것이 국민의 기본권과 적법절차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행정의 디지털화는 시대적 흐름이며 필요한 변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의 권익과 절차적 보장이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디지털 정부는 기술을 활용하되 그 기반 위에 견고한 법적 원칙과 민주적 가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A씨가 받은 그 문자 메시지 한 통은 작은 사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어떤 미래의 행정을 원하는가?

편리하지만 자의적일 수 있는 행정인가, 아니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국민의 권익을 확실히 보장하는 행정인가?

이번 판결은 그 답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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