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정에서 11년간 근무하다 골수형성이상증후군으로 사망한 근로자에 대해 법원이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의학적으로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작업환경 전반을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최수진)는 A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지난 4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A씨는 한 중소기업에서 반도체 웨이퍼 연마 및 세정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2016년 12월 건강검진에서 혈색소 수치 이상 소견을 보였고 이듬해 3월 골수형성이상증후군 진단을 받은 뒤 치료를 받아오다 2018년 12월 사망했다. 유족 측은 A씨가 작업장에서 각종 유해물질에 노출돼 해당 질병이 발병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지급을 청구했다.
그러나 공단은 “유해물질의 양이나 노출 빈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고, 해당 물질과 상병 간 의학적 관련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며 부지급 처분을 내렸다. 이에 유족 측은 “고인이 약 11년간 사업장에서 분산제, 불산 등 유해화학물질에 반복적으로 노출됐고, 개인보호구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근무했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유족 측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해당 질병의 발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질병의 발병 원인과 메커니즘이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A씨가 해당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디클로로메탄을 포함한 다양한 유해화학물질, 극저주파 전자기장, 주야간 교대근무 등 유해요소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이후 질병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어 “유해인자 노출기준은 해당 물질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며 “복수의 유해인자에 동시에 노출되거나, 평균 근로시간을 초과한 장시간 근무가 반복되는 등 복합적 유해환경이 작용할 경우, 이들 요소가 상승작용을 일으켜 질병 발생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A씨가 일반 덴탈마스크와 라텍스장갑 외에는 유해화학물질로부터 신체를 적절히 보호할 수 있는 보호구를 지급받지 못했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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