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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밀턴 프리드먼 등 시카고학파는 중남미·동유럽 등 신흥국의 젊은 인재들을 불러 모아 신자유주의 이론을 가르쳤다.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들은 자국의 정책 결정권자 자리에 오르자 무역 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 민영화 등 급격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 경제 체력에 맞지 않는 과속 정책 탓에 이 국가들은 미국 투기 자본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 대학들은 미국의 글로벌 패권을 지탱하는 주요 소프트파워이자 수출 산업이다. 주로 엘리트 집안의 자제인 해외 유학생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인권 등 미국적 가치를 퍼트리고 있다. 일부 해외 인재들은 미국에 남아 첨단 기술 개발과 혁신에 기여하고 있다. 또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쓰는 돈은 미국의 천연가스·석탄 수출액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대학은 우리의 적”이라며 주류 대학들을 공격하는 자해 행위를 벌이고 있다. 진보 세력의 구심점을 파괴하고 대학을 문화 전쟁의 대상으로 삼아 지지자들을 결집하려는 의도이다. 상당수 국민들은 “학문과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하버드대의 반발에 대해 특권층의 배부른 소리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 이런 사이 유럽연합(EU)·중국 등은 미국에서 탈출하는 과학 인재들을 하나둘씩 영입하고 있다.
대학 등 전통적 권위 집단에 대한 사회적 신뢰 하락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 현상이다. 의회와 행정부·사법부·검찰은 물론이고 언론·의료계·과학기술계 등도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신 사람들은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몰려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불확실한 미래를 타개해줄 정치적 구세주를 찾고 있다. 사회적 신뢰 자본이 고갈되는 것을 넘어 분열되고 있다.
이를 틈타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고 기존 규범과 질서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해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결과보다 절차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 자체가 위협받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12·3 불법 계엄을 선포해 대다수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보수의 최우선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처사다. 이런데도 국민의힘은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주저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선 후보 한 사람을 위해 관련 법을 바꾸고 사법부를 발 아래 두려 하고 있다. 정의·공정에 기반한 사회적 규범, 반대 진영과의 화해 등 공동체 유지를 위한 필수 요소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다. 중심이 지탱하지 못하니. … 어떤 계시가 임박한 것이 분명하다.” 코로나19 등 격변기마다 유럽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구절이다. 우리나라는 더 큰 역사적 분기점에 서 있다. 외부적으로는 우리 경제의 고도화를 이끌었던 자유화·세계화, 전후 안보 질서와 국제 규범이 무너지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저성장 고착화 위기가 커지고 세대 갈등과 진영 대립이 증폭되면서 위기 극복을 위한 에너지 자체가 고갈되고 있다.
6·3 대선이 끝나면 패배한 진영의 분노가 커지고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러다 대한민국 망한다”는 불안감도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프리드먼은 “오직 위기만이 진정한 변화를 낳는다”고 했다. 독일·네덜란드·아일랜드 등 다른 선진국은 내부 갈등을 국민 통합의 기회로 삼아 한 단계 성장했다.
차기 정부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상호 화해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성장과 복지, 생산성 향상과 사회안전망 구축 간의 균형 잡힌 패러다임을 지향하는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한편 사회경제적 양극화 해결을 위해 포용적인 정치·경제 제도를 안착시키는 작업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지금처럼 정치적 대립과 반목이 반복된다면 수십 년 동안 어렵게 쌓아올린 한국 경제의 성과와 민주주의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위기의 순간은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오일쇼크·외환위기 등을 산업 고도화와 구조조정의 기회로 삼아 경제 선진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한 제도적 기반과 내부 역량이 없다면 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정치에 달려 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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