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위비 압박이 거세지는 가운데 독일이 방위산업을 적극 육성하면서 ‘제조업 강국’의 명성을 되찾을지 주목된다. 그동안 독일 경제를 떠받쳤던 자동차·기계·화학 등 전통 제조업 분야가 힘을 잃어가는 반면 방위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으며 고용과 투자를 늘려가는 양상이다.
23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수십 년 운영되던 자동차·열차 등 공장들이 최근 무기 생산 공장으로 탈바꿈되는 사례들이 독일 전역에서 포착되고 있다. 120여 년간 독일 최동단 괴를리츠에서 열차 객차를 생산하던 알스톰은 최근 몇 년간 누적된 인건비 문제 등으로 주요 생산라인을 저임금 국가로 이전하고 대신 이 지역 공장은 폐쇄하기로 했다. 설비 확충에 나서던 방산 기업 KNDS가 알스톰 공장을 눈여겨보던 중 인수에 나섰고 해당 공장은 전차 부품 생산기지로 전환됐다. 독일 북서부 지역 오스나브뤼크에 위치한 폭스바겐 공장도 조만간 문을 닫을 것으로 알려졌는데 유럽 최대 방산 기업이자 독일의 방위 산업체인 라인메탈이 인수를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독일 산업이 전통 제조업에서 방산 등 첨단산업으로 재편되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독일에서는 자동차·기계·화학 등 주력 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며 2년 연속 경제가 역성장했다. 특히 유럽 최대 자동차 기업 폭스바겐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자국 내 공장 폐쇄 결정을 내린 것은 ‘제조업 강국’의 추락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반면 방산 분야는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럽 주요국들이 방위비 지출을 크게 늘리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의 대외 정책 변화로 독일이 국방비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을 예정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따르면 독일의 연간 방위비 지출 규모는 2020년 이후 약 80% 증가해 2024년 900억 유로(약 146조 원)를 넘어섰다. 이런 가운데 독일에서는 정부의 연간 신규 부채를 국내총생산(GDP)의 0.35%로 제한하는 ‘부채 브레이크’ 적용에서 국방비를 예외로 두는 기본법(헌법) 개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자금이 몰리고 일감이 늘어난 방산 기업들은 고용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라인메탈·딜디펜스·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스·MBDA 등 독일 대형 방산 업체 4곳은 최근 3년간 1만 6500명 이상을 신규 고용했다. 또 이들 기업은 2026년까지 1만 2000명을 추가 채용할 계획도 세운 상태다. FT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독일에서 약 25만 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재무장’ 선언은 독일 경제에 희망의 빛을 제공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대규모 수주 계약을 따낸 기업들은 주주 배당도 대폭 늘리기로 했다. 라인메탈의 경우 올해 배당금을 지난해보다 42% 올리기로 했으며 헨솔트·렝크 등도 배당금을 각각 전년 대비 25%, 40% 인상할 예정이다. 배당이 늘어나는 만큼 지역 경제 활력을 끌어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방위 산업 주도로 독일 경제가 성장 궤도에 올라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독일 정부의 방위비 증액 계획이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평가하면서 내년 경제성장률을 1.5%로 예상했다. 기존 전망에 비해 0.5%포인트 상향 조정된 수치다.
다만 특정 산업 분야의 흐름만 보고 장밋빛 기대를 갖는 것은 위험하다는 신중론도 나온다. 자동차·기계 등 전통 제조업이 독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방산 부문이 이른 시일에 주력 산업으로 대체되기는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실제 기계산업 분야만 하더라도 독일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25%(2021년 세계은행 기준)에 이른다. 자동차 산업도 독일 수출에서 약 17%(2023년 기준)를 차지한다. 독일 국민들이 여전히 전쟁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점 역시 변수로 꼽힌다. FT는 “방산 업체의 채용 계획은 자동차 기업의 일자리 감축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며 “독일 국민들이 연방정부의 재무장 움직임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할지도 불분명하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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