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하면 떠오르는 무표정한 흰색 벽면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가로 80m, 세로 9m에 이르는 거대한 벽화가 표현하는 것은 자연의 다채로운 얼굴이다. 작은 물줄기로 시작된 강이 바다로 이어지고 푸르던 하늘이 흐려지며 먹구름을 몰고 와 비와 천둥을 뿌린다. 형형색색 꽃들이 가득한 들판 뒤로 푸른 잎이 우거진 울창한 숲이 펼쳐지고 청회색으로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맹렬한 바람 옆으로 붉고 노란 불꽃이 활활 타오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30여 년에 이르는 작가 생활을 통틀어 역대 최대 규모의 벽화를 서울 강서구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선보이는 소피 폰 헬러만은 “자연을 더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의 거대한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다정하지만 때로는 위협적인 자연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개인전 ‘축제’에서 자연을 주제로 한 벽화를 그린 이유로 “내게 축제란 모두가 함께 어울려 즐기는 하나의 시간을 의미한다”며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하나가 돼 춤추고 노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느낌을 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독일 태생으로 영국 런던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소피 폰 헬러만이 9일 개막한 한국 첫 개인전을 통해 한국의 명절 ‘단오’ 등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 회화 20여 점을 공개한다. 작가는 구체적인 묘사 대신 눈부신 색채를 이용한 낭만적인 회화 작업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공간을 아우르는 설치와 벽화 형식의 대형 회화가 그의 주특기다. 이번에 공개된 대형 벽화는 한국에 8일가량 머물며 완성했다고 한다.
작가는 대형 물통에 아크릴 물감을 묽게 풀어 밑그림 없이 즉흥적으로 이미지를 펼쳐나가는 방식으로 주로 작업한다. 그는 “안개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단숨에 그려나가는 방식이 훨씬 긴장감이 높고 영감을 더 제대로 표현한다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붓질의 방향은 물론 작가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며 관람객들에게 독특한 감상을 전해준다.
작가는 이번 전시 주제로 축제를 선택하며 특히 ‘단오’에 주목했다. 그는 “전시가 개막하는 시기와 맞물려 5월 봄을 기념하는 축제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다만 한국의 전통을 있는 그대로 담기보다는 작가의 상상과 감각으로 재구성한 작품들이 많다. 실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는 작가는 벽화를 제외한 작품 대부분을 영국에서 완성했다. 그래서인지 작품들은 한국의 전통을 소재로 하는데도 이국적이고 낯선 감상이 앞선다. 색색의 옷을 입은 채 신대를 들고 파도 치는 바닷가를 거니는 여인을 묘사한 ‘의식’, 산에 올라 신이 깃든 나무를 고르는 신목 행차를 표현한 ‘산행’, 그네 타는 여성과 줄 타는 남성을 함께 등장시킨 ‘단오’ 등은 현실이라기보다는 꿈결같은 분위기로 가득하다.
작가는 특히 풍요를 기원하는 단오의 의미와 축제를 장식하는 다채로운 색감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봄과 싱그러움을 생각하며 초록색을 많이 썼고 밝음과 화사한 느낌을 더하기 위한 노란색과 분홍색, 태극과 한복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 등을 많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친구의 어머니가 한국인인데 탈춤을 췄던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떠올랐다”면서 “정말 흥미로운 일화였는데 그 기억을 토대로 단오의 관노가면극을 표현한 ‘탈춤’을 완성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작품들은 배경이 되는 벽화와 조화를 이루며 더 풍성한 이야기를 전한다. 예컨대 나무가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는 자유로이 들판을 거니는 ‘춘향’이 내걸리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지점에 활을 쏘는 ‘몽룡’이 전시됐다. 꽃들이 가득해 ‘플라워 월’로 이름 붙인 벽면에는 김소월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진달래꽃’과 화사한 분위기로 그네를 타는 여인을 묘사한 ‘경칩’ 등이 어우러졌다. “전시장의 벽화가 주는 극적인 느낌까지 더해 ‘희망이 담긴 축제와 자연에 대한 찬미’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그림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즐거움이다. 관람객들이 작품을 하나의 재미있는 꿈이나 영감처럼 여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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