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을 걷어라 /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주오 /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미세먼지 탓에 눈이 시린 것보다 답답한 마음에 가슴이 시린 날이 길어지던 어느 날부터 오래된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됐다. 희망인지 체념인지, 아니면 그 경계의 어디쯤에서 막연한 혼란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우리나라 포크송의 대부 한대수가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처음 불렀다는 ‘행복의 나라로’는 알려진 대로 군사정권 시절 금지곡이었다. 이 노래를 ‘금지’한 사유가 ‘행복의 나라’가 북한을 의미했다는 황당한 분석도 있는데, 이보다는 당시 정권이 ‘가사대로라면 대한민국이 행복의 나라가 아니다’라는 해석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왠지 설득력 있어 보인다.
57년 전 대한민국이 대다수 국민들에게 행복한 나라가 아니었음을 굳이 무슨 지표로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2025년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모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매년 영국 옥스퍼드대 웰빙연구센터와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한다. 19일 발표된 2025년 보고서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8년 연속 1위를 차지한 핀란드를 비롯해 북유럽 국가 다수가 상위권을 차지한다는 것과 미국이 24위로 역대 최저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북유럽 국가 국민들이 스스로에게 높은 행복 점수를 주는 이유는 뭘까. SDSN은 그들이 보편적으로 고품질의 건강, 교육, 사회적 지원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과 함께 이 같은 개인 삶의 만족도가 타인에 대한 친절, 사회적 신뢰와 연결된다고 평가했다. 반면 미국 국민의 행복 점수 하락 원인은 단순했다. ‘혼밥’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정치 양극화’ 때문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우리의 행복 점수는 6.038점, 조사 대상 147개국 중 58위였다. 지난해 52위에서 6계단이나 떨어졌다. 1년여를 거슬러올라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자. 솔직히 개인의 소소한 일상을 떠나서는 행복감에 취했던 기억이 없다. 연초부터 시작된 의정 갈등과 이에 따른 의료대란으로 국민들은 1년 넘게 불안에 떨고 있다. 심각한 경기 침체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못했고 올해 경제성장률은 1%대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치 브로커라는 명태균이 정국의 변수로 떠오르면서 모든 뉴스를 집어삼킬 무렵 느닷없었던 계엄은 결국 대한민국을 장막 속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수개월간 모든 것이 불확실한 나라에서 모든 국민이 행복하지 못했다. ‘계몽령’이라 주장하는 직무 정지된 대통령과 이에 다수가 동조하는 여당, ‘사법 리스크’에 떠는 대표와 탄핵에 중독된 야당이 폭주하는 사이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타인에 대한 친절’ 따위는 대한민국에서 사라졌다. 광장의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어느 편에 서기를 원하는지에 따라 동지가 되거나 적이 될 뿐이다. 그들의 뒤에서 선전과 선동의 맛을 충분히 확인한 이른바 ‘리더’라는 인물들에게 갈라진 상처의 치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행복하기 위하여, 행복의 나라로 가기 위하여, 램프 속 지니를 불러내 소원을 비는 알라딘이 돼보자. 포퓰리즘과 망상, 리스크에 갇혀 폭력과 협박이 정치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지도자들이 홀연히 사라지기를 빌어본다. 약간의 혼란이 찰나처럼 지나면서 드디어 뿌연 장막이 걷히고 맑은 하늘처럼 사람과 세상이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북유럽의 나라들처럼 사회적 신뢰가 회복돼 대치 상태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나른한 행복에 젖는다. 알라딘의 램프와 지니가 ‘슈퍼 위크’라고 불리는 이번 주에 대한민국에 나타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준다면, 그렇게 소원을 들어준다면. 그때 부를 ‘행복의 나라로’는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고개 들고서 오세 손에 손을 잡고서 /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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