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분위기 때문인가 싶다. 퇴근길 강변북로에서 바라보는 서울 여의도 빌딩들의 불빛도 크리스마스트리 전구처럼 따뜻한데 그런 즈음의 칼럼까지 뾰족한 글로 채워야 하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위로와 응원이 더 필요한 시간 아닐까. 그래서 이번 칼럼은 50대 월급쟁이라면 누구나 공감했던 드라마의 제목을 빌려 필자의 이야기로 시작해본다. 지금은 자회사 TV로 파견돼 보도본부장 직함으로 일하고 있지만 10년 가까이 그렇게 불렸던지라 여전히 익숙한 ‘박 부장’이라 칭하기로 했다.
드라마의 김 부장처럼 나 역시 ‘서울 자가’에 산다. 비록 26년 된 구축 아파트지만 남산이 동네 뒷산인 데다 시내와 강남 어디든 멀지 않아 주거 만족도는 매우 높다. 게다가 아파트 매매 시점이 2013년, 유례없는 ‘거래절벽’이었던 때라 무릎도 아니고 발등쯤의 가격에 샀으니 부동산 투자는 대단히 성공한 편이다. 하지만 당시 받았던 주택담보대출은 여전히 절반가량 남아 있다. 당시 ‘안심전환대출’ 등의 수혜로 2% 남짓 했던 금리가 지금은 4%를 넘는다.
매월 원리금 부담이 만만치 않은데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 그 주담대를 다 갚지도 못하고 퇴직할 공산이 크다. 한참 위 선배들만의 얘기인 줄 알았던 ‘인생 2막’이 시작되는 셈이다. 꼬박 30년을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으면 봄여름가을겨울이 부른 노래의 가사처럼 ‘지금껏 달려온 너의 용기를 위해’ 한 번쯤 ‘브라보’를 외쳐도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라는 질문만 꼬리에 꼬리를 문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끝이 아니다. 느닷없는 소나기처럼 찾아올 ‘사회적 단절’을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지도 숙제다. 휴대폰에 저장된 수많은 연락처 중 가족이나 친구 몇 명을 빼고는 찾아볼 일도 없어질 게 분명하다. 하루 종일, 아니 일주일 내내 울리지 않는 휴대폰에 익숙해지는 연습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미 지금도 갑자기 저녁 약속이 취소된 어느 날, ‘번개’를 쳐서 소주 한잔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 50대 중반을 넘긴 가장들의 대화는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저마다의 솔루션은 다양하고 신박하다. 우선 귀농이 다수를 이룬다. 촌에서 자라 농사일에 제법 자신 있고 정착을 도와줄 고향 친구들도 많다고 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솔직히 부럽다.) 개인택시나 프랜차이즈 창업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리고 공인중개사 자격증 역시 단골 메뉴다. 퇴직 전까지 죽기 살기로 돈을 모은 후 퇴직금을 더해 배당형 상장지수펀드(ETF)에 넣어놓고 여행을 다니겠다는 재테크형도 만났다. 더러는 전업 작가를 생각하는 이도 있었고 뒤늦게 유튜브를 해보겠다는 지인도 있었는데 실현 가능성은 따져 묻지 않았다.
그 ‘새롭거나 아주 낯설 인생의 2막’이 누군가에게는 잠시 유예됐고 누군가에게는 당장의 현실이 됐다. 2025년이 저물어가면서 50대 가장들의 인사에 어김없이 희비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어떤 부장들은 승진해 결국 임원이 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고 1년 연장된 임원들은 편안하게 연말 모임에 나간다고 했다. 종료 통보를 받은 임원들도 적지 않다. 몇 달은 아무 생각 없이 쉬고 놀면서 후일을 고민하겠다고 담담히 전했다. 승진을 한 이들에게도, 퇴직을 앞둔 이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가까이에서 그들의 노고를 생생히 봐왔기에.
드라마 주인공 김낙수가 새로 시작한 세차 일과 전 직장 상사의 유혹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중 김 부장 자신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김낙수와 김 부장은 “그 알량한 자존심 좀 내려놓자”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낙수에게 김 부장은 말한다. “낙수야~ 행복해라.”
수십 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가장들이 자존심이든 책임감이든 무언가를 내려놓고 홀가분해졌으면 좋겠다. 울타리 같은 가족을 믿고 든든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꼬리표 같은 직함이 사라지고 김낙수로, 박태준으로 살아가기 시작해야 하는 출발선에 섰을 때도 편안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또 나에게 새해 인사를 전한다. “부디 2026년 행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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