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에서 발화한 산불이 나흘째 맹위를 떨치며 천년 고찰이자 국가 보물인 고운사가 완전히 소실됐다. 여기에 산불이 세계문화유산인 안동 하회마을 인근과 청송 주왕산국립공원으로까지 번지는 등 불길이 거세지고 있다. 교정 당국은 산불이 번질 위험이 있는 경북북부교도소와 안동교도소에 수용 중인 재소자에 대한 이송 절차를 진행했다. 인근 청송군에서 60대 여성이 소사 상태로 발견되는 등 인명피해가 발생할 정도로 화재 영향이 심각한 지역이 확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산불 진화에 투입돼야 하는 헬기가 부품 수급 등을 이유로 가동이 불가능한 사례가 상당수 보고돼 소방당국의 애를 태우고 있다.
25일 소방청과 산림당국 등에 따르면 경북 의성 산불이 거센 바람을 타고 나흘 동안 활활 타오르고 있다. 전날 71%에 달했던 경북 의성 산불 진화율은 이날 오전 54%로 급락하는 등 소방당국은 산불 진화에 애를 먹고 있다. 이날 오후 경북 의성 산불 진화율은 68% 수준까지 높아졌지만 피해 사례가 계속 보고되고 있다.
이날 산불은 하회마을과 직선거리로 8㎞가량 떨어진 곳까지 번져 하회마을 주민들이 대피하는 등 추가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안동시는 관내 전 시민에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고 안내하고 국립경국대 안동캠퍼스에도 대피령을 내렸다.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는 산불에 전소됐으며 고운사 내에 소장중이었던 보물 제246호 석조여래좌상 등 유형문화유산은 사전에 경북 각지로 옮겨져 화마를 피했다.
이날 의성 산불은 안동시 길안면과 풍천면 일대는 물론 청송·영양·영덕으로까지 번졌다. 청송군은 파천면·진보면·안덕면 일대 주민에게 즉각 대피령을 내렸다. 청송에서는 이날 60대 여성이 숨진채 발견되기도 했다. 경찰은 “산불에 인한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오후부터 청송 주왕산국립공원에 불씨가 붙기 시작하며 인근 대전사 승려들에게도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대전사에는 보물 제1570호인 보광전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이밖에 영양군 석보면, 영덕군 지품면 등에도 불씨가 비화했다. 이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각 지자체에 “주민 대피에 전 행정력을 동원해 달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다.
이례적으로 교도소 수용자에 대한 이감도 진행됐다. 법무부는 경북북부교도소(옛 청송교도소) 수용자 2700여 명, 안동시 풍산읍 소재 안동교도소 수용자 800여 명 등 총 3500여 명을 대상으로 이송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경북 의성에서 발생한 불길이 나흘째 타오르는 배경으로는 불기둥으로 상승한 불똥이 강한 바람을 타고 날아가 또다시 불을 내는 이른바 ‘비화’ 현상이 첫손에 꼽힌다. 비화 현상은 ‘도깨비불’에도 비유되며, 특히 산불 발생 초기 초속 15m의 강한 바람이 불며 불길을 키웠다. 이날도 초속 5m 내외의 바람이 불며 소방당국의 애를 태우고 있다. 비화는 수백m 이상 떨어진 곳에 날아가 새로운 불을 만들어 내며 긴 불똥이 상승기류 및 강풍을 만나면 최대 2㎞ 정도까지 날아갈 수 있다.
이처럼 건조한 날씨와 거센 바람이 더해지며 영남 지역 일대에는 산발적 산불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 오후에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에 산불 2단계가 발령됐으며 산림 당국은 일원 마을, 양우내안에아파트, 울산양육원 등에 대피 명령을 내렸다.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산불도 이날 한때 진화율이 98%까지 올랐다가 도로 재확산하며 10개 마을에 추가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경남 산청 시천면에서 발생한 산불은 닷새째 이어지며 인근 하동 옥종면으로 번진데 이어 지리산국립공원 근처까지 확산돼 소방당국을 긴장케 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산림청과 소방당국은 산불 진화용 헬기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산불 진화를 주력으로 담당하는 KA-32 카모프(3000ℓ급) 기종의 대형 헬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부품 수급이 어려워 3분의 1가량이 가동이 되지 않고 있다. 현재 당국은 KA-32 헬기 29대를 보유중이지만 이 중 8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부품을 교체하지 못해 지난해 상반기부터 진화 전력에서 배제된 상황이다.
산불 장기화에 따른 정비 일정도 변수다. 경남 의성·산청, 울주 등 대형 산불 현장에는 KA-32를 비롯한 33대의 헬기가 투입됐지만 일시 정비 등으로 이날 하루에만 9대가 전력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임차한 헬기 또한 대형 산불 지역에 투입됐지만 각 지자체 상황에 따라 공중 진화 전력에서 언제든 빠질 수 있다는 점도 불안요소다. 영남 대형 산불에 임차헬기를 지원한 지자체뿐 아니라 여타 지자체 역시 지역내 산불 발생 가능성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전북도의 경우 산림청 헬기가 영남권 산불 지역에 동원되다 보니 23일 발생한 2건의 산불은 3대의 임차 헬기를 이용해 진화하기도 했다. 22일 무주와 인접한 충북 옥천에서 발생한 산불에 전북도 임차 헬기가 동원된 바 있다.
조종사들의 피로도 가중되고 있다. 산불 초기 초속 15ｍ 달하는 강풍으로 초동 진화에 실패하며 조종사들의 업무 피로도가 쌓인데다 100㎞ 달하는 화선에서 뿜어지는 연무로 인해 진화율은 갈수록 더뎌지고 있다. 여기에 산불 장기화로 시야를 가리는 연기가 곳곳에서 발생하면서 가용 헬기 또한 시계 불량으로 운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산림청에 따르면 23일 오전 경북 의성 산불 현장에 투입된 진화 헬기들은 산불 지역 내 짙은 연무 때문에 제대로 성과를 내기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북 의성 산불의 전체 화선이 228㎞에 달하는 데다 남은 화선은 102.8㎞ 수준인 만큼 지금과 같은 헬기 자원으로는 진화율을 끌어올리기에 한계가 명확하다. 국립산림과학원 관계자는 “산불 장기화로 화선마저 길어지면서 공중 진화에 어려움이 상당한 상황“이라며 “헬기를 이용한 공중 진화는 가용자원을 집중했을 때 효과가 가장 크지만 영남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나 진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hopin@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