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비약만 챙기고 나머진 다 팽겨치고 도망 나왔지. 바람이 부니까 시뻘건 불이 솟구치는데 몸이 굳더라."
23일 올해 첫 대형 산불이 발생한 산청 지역은 한숨과 탄식이 가득하다.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한적한 마을에서 노후를 계획했던 노부부는 전재산을 잃을 위기에 놓였다. 서울에서 35년을 거주하다 산청 시천면 원리마을에 전원주택을 마련한 80대 이춘융·김순정 부부는 21일 오후 헬기가 뜬 뒤 산불이 난 것을 인지했다. 처음 산불이 났을 때만 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이들은 이튿날 창원의 친척집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시 보금자리로 왔다.
친척집에서도 뜬 눈으로 밤을 샌 이들은 "산청으로 온 지 6년인데, 이 기간 작은 산불은 3차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전원주택에서 한적한 생활을 꿈꿨지만 큰 산불로 인생의 마지막 계획이 무너지고 있다. 대피소 위치도 몰라 겨우 이 곳으로 왔는데 먹을 것도 넘어가지 않는다"고 탄식을 쏟아냈다.
점동마을에 거주하던 이정옥(78) 씨는 23일 오전 산청군 단성면 단성중학교 임시대피소에서 화재 당시 대피 상황을 회상했다.
그는 "밭일을 하다 보니 멀리 뒷산에서 연기가 나는 게 보여 산에 불이 난 걸 알았다"며 "1~2시간 만에 우리 동네까지 불이 넘오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불이 달아나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마근담 마을에서 양봉업을 하는 김용한(71) 씨는 월동을 마친 벌들이 새끼를 낳고 한창 먹이를 구하고 할 시기에 불이 번지고, 연기가 뒷산으로 불어 벌들도 온전치 못할 것 같다며 생계 걱정을 했다.
시천면 덕산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10여 명은 “두려운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선생님과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가자는 대로 따르다 보니 지금 여기(대피소) 와 있다. 여기서 친구들 선배들 만나 조금 안심이 된다”고 했다. 양만석 덕산중 교사는 대피소로 이동한 학생들을 관리 중이다. 양 교사는 덕산중 학생 20여 명이 대피소나 타 지역으로 이동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학교가 화재 현장과 가까워 인솔하고 있다"며 "남학생들은 우선 샤워 등을 하고 싶다고 해 단성중학교 레슬링부에 요청했는데 여학생들은 씻는 것도 쉽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21일 산청 시천면에서 시작된 산불로 인근 마을에 지내는 255가구, 347명이 임시대피소로 피난했다. 이들은 22일 선비문화연구원으로 대피했다가 불이 확산하자 더욱 안전한 지역으로 분산됐다. 현재 동의보감촌휴양림, 휴롬빌리지, 단성중학교, 단성초등학교, 덕천강체험휴양림, 산청엔복지관분관, 단성당산마을 경로당 등 신안면 엘리제모텔 등으로 이재민들은 분산된 상태다.
대피 인원이 가장 많은 단성중에는 체육관 내 가로세로 각 2m 정도의 정사각형 모양 천막이 35동 설치돼 있었다. 주민들은 담요와 생수 등 필수 구호 물품을 받아 이 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3시 26분께 발생한 산청 산불 현장은 주변 산세가 워낙 험한 데다 바람도 강해 진화율이 현재 55%를 기록하고 있다. 산불영향구역은 1329㏊이며 총 화선은 40㎞다. 이 중 28㎞를 진화 중이고, 12㎞는 진화가 완료됐다. 주택과 사찰 15채가 전소되고 산불 진화대원 4명이 사망하는 등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산청 산불 영향권에 있는 신천초와 덕산초, 덕산중·고등학교 등 4개 학교는 24일 휴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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