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6세로 별세한 김병기 화백은 생전 ‘한국 근현대미술의 산증인’으로 불렸다. 우리나라 3호 서양화가 김찬영의 아들이자 ‘황소의 화가’ 이중섭의 평생지기였던 화백은 김환기·유영국 등과 함께 한국 화단에 추상미술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에게 또 다른 면모가 있었으니 바로 예술 행정가였다. 서울대 교수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지내며 한국 미술계를 이끌었던 화백은 1960년대 초반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국제미술전 참가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그의 실력이 유감 없이 발휘된 장소다. 한국관 커미셔너(책임자)로 참가한 화백은 김창열·정창섭·박서보·권옥연·이세득·이응노·김종영 등 한국 미술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30~50대 7명을 선정해 한국 미술의 위상을 뽐냈다. 또 현지에서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한국인 최초의 국제전 심사위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이응노의 명예상 수상을 이끌었다.
5일부터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한 화백의 작고 3주기 기념전 ‘김병기와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화백이 행정가로 활약했던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역사적 순간을 재현하는 특별한 시도를 한다.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이 2025년을 여는 첫 전시다.
현재는 소재가 불분명한 당시 출품작 일부를 포함해 참여 작가들의 1960년대 초·중반의 작업 경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힘들게 구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는 총 8명인데 비엔날레 참여 작가 7명에 김환기가 포함됐다. 김환기는 1963년 열린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수상한 뒤 8회 비엔날레에서 특별전을 열어 ‘에코(Echo)’ 연작 9점을 포함한 총 14점을 출품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출품됐던 에코 연작 중 3점을 만날 수 있는데 ‘에코 1’의 뒷면에는 비엔날레 출품 당시의 원본 태그가 남아 작품의 역사적 가치를 한층 더했다. 김환기의 작품 옆으로는 1965년 비엔날레 명예상을 수상한 이응노의 ‘구성(Composition)’ 연작이 걸렸다. 이중 1960년 작품은 비엔날레 한국관 브로셔에 수록된 작품으로 당시 작가의 조형 실험을 엿볼 수 있다. 또 유족이 소유하고 있는 명예상 메달의 앞·뒷면도 공개했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의 초기 화풍을 경험할 수 있는 당시 출품작도 원본으로 만날 수 있다. 김창열은 100호 크기의 ‘제사’ 연작 3점을 출품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중 한 점인 ‘제사 Y-9’이 전시장에 내걸렸다. 해당 작품 외에도 김창열의 1960년대 초반 화풍을 살펴볼 수 있는 2점이 더 공개된다. 또 조각 부문 작가로 선정됐던 김종영의 조각 2점이 전시됐는데 이중 나무로 제작된 ‘65-2’가 비엔날레 출품작과 같은 시리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만 다른 작가들의 경우 당시 출품작의 소재 파악이 어려워 비슷한 시기의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례로 김병기가 김창열·정종섭과 함께 가장 먼저 참여 작가로 선정했던 박서보는 100호 크기의 ‘원형질’ 시리즈를 출품한 것으로 확인되지만 원본이 전해지지 않아 1960년대 원형질 연작 중 일부 작품과 함께 후기의 작품 색채 묘법을 전시했다.
총 3개 공간에서 두 가지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는 김병기 화백이 평생을 걸쳐 치열하게 고민한 추상미술의 여정도 만날 수 있다. 100살이 넘도록 붓을 들고 신작을 그렸던 화백의 말년기 대표작 ‘메타포(2018)’를 비롯해 주요 작품 10여 점이 전시됐다. 1970년대 미국 사라토가 시절의 풍경을 그린 드로잉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예리한 비평으로도 이름을 떨쳤던 화백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1950~1960년대 미술 잡지들과 1986년 가나화랑에서 열렸던 최초의 귀국전인 ‘김병기 작품전’의 도록,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얽힌 이야기와 말년까지 인생 회고가 담긴 화백의 영상 자료 등도 만날 수 있다. 가나아트·가나문화재단은 “이번 전시가 단순한 회고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이 국제 무대에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을 살피는 역사적 기록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4월 2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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