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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 철학 향기로 구현…진한 여운 줬으면"

◆'국내 1호 향기작가' 한서형 씨

나태주 시인과 '소망…' 시집 출간

11가지향 어우러진 '소망향' 담아

향기 넣는 건 정체성 부여하는 일

스스로 행복할 때만 작품 만들어


“우리 뇌에서 향기를 기억하는 부위(대뇌변연계)는 감정이나 기억을 감지하고 처리하는 부위와 같다고 합니다. 어떤 향기를 맡으면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향기시집도 독자들에게 진한 여운이 남는 좋은 책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한서형 향기작가와 나태주 시인이 함께 작업한 향기시집 ‘소망 마음속에 기르다’가 7일 출간됐다. 한 작가는 2022년 나 시인과 함께 펴낸 ‘너의 초록으로, 다시’를 출간하면서 향기작가로 정식 데뷔했다. 나 시인과는 그동안 ‘잠시향’과 ‘사랑 아무래도 내가 너를’을 포함해 총 4권을 함께 작업했다. 이번 시집에는 소망을 주제로 엄선한 나 시인의 시 120여 편에 한 작가가 직접 만든 ‘소망향’을 입혀냈다.

경기 가평군 작업실에서 만난 한 작가는 “처음에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별처럼 느껴져서 상처가 난 나무에서 나오는 반짝이는 황금빛 나뭇진을 주제로 했다가 나 시인의 시 ‘믿어야 한다’를 읽고 땅에 뜨는 별, 새싹을 떠올리게 됐다”고 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책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한 작가는 “소망향에는 총 11가지 향기가 어우러져 있는데 딜·캐롯·카다멈 등 씨앗향과 향나무에서 추출한 나뭇진향 등이 적절히 섞여 있다”며 “굳이 어떤 향인지 구분하려 애쓰기보다 향 그대로를 느껴달라”고 당부했다.

한 작가는 향기시집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국내 1호 ‘향기작가(Aroma artist)’다. 2016년 향기를 입힌 삼나무 달항아리 작품 전시를 시작으로 책이나 사진과 같은 분야에서 작가들과의 협업부터 전시관·박물관 등을 향기로 연출하는 공간 연출, 브랜드나 제품에 향기를 입히는 향기 브랜딩 등 다양한 분야로 영역을 넓혀왔다. 그동안 작품으로 만들어진 향기만 해도 70여 개다. 유동룡미술관과 삼성카드 시그니처 향 ‘RION’ 조향, 국립부여박물관의 국보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 기념 특별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구본창: 사물의 초상’ 전시 연출 등이 대표적이다.

한서형 향기작가가 경기 가평군 작업실에서 조향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향기작가라는 의미에 대해 단순히 좋은 향을 적절히 배합하는 게 아니라 작품마다 정체성을 부여하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한 작가는 “사람의 첫인상처럼 모든 예술 작품이나 사물에도 특정 이미지로 연상되는 고유의 향기가 있다”면서 “어떤 대상에 향기를 더하는 일은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창작자의 철학을 향기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 역시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작품에 향기를 부여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조향(調香)이라는 기술적인 영역을 넘어 대상에 따라 관련 논문을 읽거나 인물사를 공부하고 역사적인 배경이나 시대상을 파악해야 할 때도 있다. 향기를 만드는 과정은 의뢰인과 수차례 논의를 거쳐 주제가 정해진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오롯이 향기를 만드는 제작 기간만 1개월 이상이 걸린다. 이렇게 탄생한 향기에는 각각의 이름과 함께 작품으로써 저작권이 부여되고 한번 만들어진 향기는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없도록 별도의 레시피로 영구 보존된다. 한 작가는 “대상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나한테 말을 걸어오듯이 떠오르는 향이 있다”며 “스스로 행복할 때에만 향기를 만드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은 잊혀진 작품이나 대상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향기로 연출하는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에 대해 한 작가는 “작품이 전시된 공간이나 사물에 향기를 입혔을 때 사람들의 머릿속에 특정한 기억으로 각인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작가로서 목표 역시 베스트셀러보다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향기가 그리워 다시 찾는 스테디셀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한 작가는 “앞으로 다양한 협업을 통해 향기로 독자들을 찾아뵙겠다”면서 “그땐 저를 작가가 아닌 향기로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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