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임금이나 밀린 대금 등 당장 지급해야 할 돈조차 없어 궁지에 몰린 후에야 기업들이 회생법원을 찾아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법정에 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서 졸업하려면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죠.”
정준영 서울회생법원장은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회사가 재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은 회생 신청 전에 사전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회생법원의 목표는 결국 기업 정상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후 구조조정인 회생절차에 앞서 사전 구조조정에서도 회생법원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다.
이달 10일 취임한 정 법원장은 2017년 국내 최초 회생법원의 설립과 주요 제도의 기틀을 만든 도산법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2010년 서울중앙지법 파산부 재판장을 지낸 뒤 같은 법원 파산수석부장판사로 발탁됐다. 서울중앙지법의 파산부가 서울회생법원으로 출범한 당시 초대 수석부장판사를 거쳤다. 한보그룹·웅진홀딩스 등 굵직한 회생 사건을 담당한 그는 도산법연구회장도 지냈다.
정 법원장은 한계기업이 재기하기 위한 골든타임은 회생절차 신청 전 6개월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앙지법 파산부 재판장이었던 2011년도 중소기업가들과의 간담회를 열었는데 기업 대부분이 6개월 전부터 회사의 위기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회사 홀로 당장 채권자들과 실효성 있는 협상도 안 되고 막상 회생절차 신청하면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걱정에 뒤늦게 법원을 찾은 경우가 대다수”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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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절차를 신청하는 기업들에 ‘불량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이 때문에 경영에 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그가 사전 구조조정 제도를 마련하는 핵심적인 이유다. 정 법원장은 “회생절차를 신청하기만 해도 법적 절차 시작 전부터 금융권이 기한이익상실(EOD)을 선언하고 회사 내 인력은 앞다퉈 경쟁사로 이직한다. 거래처와의 계약도 끊기면서 오히려 신청 이후에 경영이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구멍 난 배가 가까스로 항구를 찾았는데 돈을 빌리지 못해 배 수리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과 같다”고 지적했다.
그가 구상하는 사전 구조조정 제도는 배에 구멍이 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예방 차원에서 미리 부품을 구비하는 것과 비슷하다. 회생절차 신청 없이도 자율구조조정(ARS) 제도를 활용해 법원 내 조사위원이 한계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파악하고 기업은 이를 바탕으로 채권단과 대안을 논의하는 방식이다.
정 법원장이 주목하고 있는 사전 구조조정 모델은 미국 연방 파산법 내 규정인 ‘챕터11’ 제도다. 채무자가 사업을 계속 운영하면서 부채를 재조정하고 회사를 재건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라는 점에서 국내 회생절차와도 비슷하지만 사전적 구조조정의 제도로도 활용되고 있다. 그는 “챕터 11은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 전에 주요 채권자들과 미리 구조조정 계획을 협상하고 있다”며 “합의된 계획을 가지고 회생절차에 진입하면 절차가 보다 신속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기업 정상화에도 효율적인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서울회생법원이 사전 구조조정 제도를 도입할 경우 효율적인 구조조정과 기업 경영 정상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전 구조조정 절차에서 미리 외부 자금 유치나 DIP 파이낸싱(회생절차 기업에 시중은행·정책금융기관 등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 활용 방법 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회생법원은 캠코를 비롯해 산업은행·신용보증기금 등 주요 금융기관과 회생 기업 운영자금 지원 등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고 있다.
정 법원장은 사전 구조조정이 경기에 취약한 중소기업의 회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회생법원에는 중소기업 사건이 많아 중소기업 회생이 주요 화두이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회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금융기관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사전적 구조조정 제도를 통해 기업들이 미리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정 법원장은 이어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이 한 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사전적 구조조정을 통해 효율적인 회생 방안을 찾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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