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빈으로 가다 보면 첫 눈에도 마음을 빼앗길 만한 푸른 호수를 만날 수 있다. 단지 푸르다는 표현은 언어의 빈곤함 만을 드러낼 뿐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신비가 느껴지는 곳이다. 나 역시 그 호수의 아우라에 매료되었고, 그곳이 어둠에 빛을 더하려 했던 말러(Gustav Mahler·1860~1911)와 금빛 색채 화가로 불리는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가 시간차를 두고 머물렀던 아터제(Attersee) 호수임을 알게됐다.
말러는 1893년부터 1896년까지의 여름을 이곳으로 찾아와 호수 바로 앞에 오두막을 짓고 작곡에만 전념했다. 그는 여섯 개의 가곡과 두 개의 심포니를 여기서 작곡했는데, 말러가 가장 오랜 시간 고뇌했던 교향곡 2번 ‘부활’이 이곳에서 완성됐다. 이 곡은 죽음과 삶을 관통하며 인류 근원의 빛을 찾아 나선다. 베토벤 ‘합창교향곡’에서와 같이 성악이 등장하며 이와 함께 대규모 악기로 편성된 5악장의 거대한 곡이다. 올해 초 서울시향과 KBS교향악단이 이 곡을 연주할 계획이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말러의 ‘작곡 오두막’에서 그의 피아노에 앉으면 창 밖으로 호수가 차오른다. 자연의 빛은 지친 음악가에게 영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클림트는 평생의 뮤즈였던 패션디자이너 에밀리 플뢰게(Emilie Fl?ge·1874~1952)와 그녀의 가족과 함께 이 호수에서 1900년부터 1916년까지의 여름을 보냈다. 마지막 7년은 거의 머무르다시피 했고 그의 풍경화 대부분을 이곳에서 그렸다. 아터제는 화가에게 자연과 호흡하도록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선사했다.
아터제 호수를 만나기 전 클림트는 굴곡진 시간을 견디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클림트는 기록화 ‘부르크극장의 오디토리움’(1888~1889)을 계기로 유명해졌다. 이 그림에 당시 사교계의 인물들 150여 명의 표정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 클림트 초기 전통적 스타일을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작품 제안이 들어왔고 빈 대학도 그에게 천장화를 의뢰하게 된다. 그러나 클림트는 1892년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겪으며 3년 동안 그림을 멈추고 삶과 죽음에 관해 성찰하는 시간을 보낸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클림트만의 화풍은 이 때 만들어갔다. 그리하여 1897년 기존의 예술로부터 분리돼 ‘자유’를 표명하겠다는 ‘빈 분리파(Secession)’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클림트는 1894년 빈 대학이 의뢰한 ‘철학, 의학, 법학’ 3점의 천장화를 1900년부터 1903년까지 한 작품씩 공개했고, 전통적인 사실화를 기대했던 당시 보수적 지식인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빈 대학 교수들은 작품 설치에 대해 반대 서명을 했고 예정됐던 클림트의 교수 임용도 취소 됐다. 그의 작품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결국 모두 회수당해야 했다. 클림트는 심하게 상처를 받았지만 어떤 편승도 없이, 자신의 진보적인 작품 세계를 꿋꿋하게 지켜갈 수 있는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클림트가 베토벤의 심포니 9번 ‘합창’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1901년 새로운 세기를 맞아 빈 분리파 회원들은 베토벤을 주제로 제14회 전시 준비에 한창이었다. 빈 분리파 회관인 제체시온(Secession)을 전시장으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1870~1956)이 프로젝트 기획을 맡았고, 독일의 조각가 막스 클링거(Max Klinger·1857~1920)가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베토벤 조각상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클링거가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의 영향을 받아 16년 동안 음악·미술·철학 등을 총 망라하는 종합적인 예술을 지향한 결실과도 같았다.
그 미래지향적 프로젝트를 구현하기 위해 스물한 명의 빈분리파 예술가들이 빈 제체시온의 공간 곳곳을 가득 채웠다. 클림트의 작품은 ‘베토벤 프리즈’로 불리는데, 프리즈(frieze)는 그리스 신전 윗 부분의 부조 장식을 뜻하는 말이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이 신전의 중심이라면 클림트의 34m에 이르는 세 면의 벽화는 신전의 부조장식 역할을 맡고 있다.
클림트의 이 작품은 베토벤 합창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를 오마주했다. 벽화의 1면에 등장하는 기사는 행복을 찾아 나선 인간을 상징하고 있으며, 2면에서는 온갖 고통과 유혹의 형상들이 죽음과 악을 표상한다. 3면은 이러한 혼돈을 극복하고 천사들과 남녀의 입맞춤으로 모든 것을 화합으로 이끌며 베토벤의 음악으로 스며들게 한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오니 함께 포옹하라.”
‘환희의 송가’는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실러(Friedrich von Schiller·1759~1805)가 스물다섯 살이던 1785년에 쓴 시를 베토벤이 발췌해 가사로 사용한 것이다. 실러는 본래 ‘환희(Freude)’가 아닌 ‘자유(Freiheit)’를 쓰고 싶어했지만 검열 때문에 ‘환희’를 쓸 수 밖에 없었다는 추측이 있다. 명 지휘자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1990)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을 때 베를린에서 ‘자유의 송가’로 가사를 바꾸어 연주하기도 했다.
’베토벤 프리즈‘로 클림트는 그 고유한 황금빛 시대를 열게 된다. 이 작품은 전시가 끝나고 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살아남아 일부 복원되어 다시 설치되었으니 그 강인한 생명력에 찬사를 보낸다.
이 프로젝트의 개막식은 1902년에 열렸다. 여기서 베토벤, 클림트, 말러가 조우하며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이들은 모두 시대를 앞서 자신만의 길을 튼 예술가들이다. 이 날 말러는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 앞에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직접 편곡하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세 명의 예술가가 함께한 자유의 빛이 울리는 순간이다.
제체시온 정면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엔 그들의 자유를(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어쩌면 쉽게 이룰 수 없기에 모두가 영원히 자유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새해를 맞이하며 자유의 송가를 기다리는 이유기도 하다.
▶▶필자 김보라는 성북구립미술관 관장이다. ICOM 한국위원회와 (재)내셔널트러스트의 이사이며, 서울시 박물관미술관 진흥정책 심의위원, 경기도 건축물 미술작품 심의위원이다.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했고, 경기도미술관에 근무하며 건립 TF 및 학예연구사로 일했다. 국내외 전시기획과 공립미술관 행정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다. 2009년 자치구 최초로 개관한 성북구립미술관의 학예실장을 거쳐 2012년부터 지금까지 관장을 맡고 있다. 윤중식·서세옥·송영수 등 지역 원로작가의 소장품을 확보해 문화예술 자산에 대한 연구 기반을 확장했고 예술가의 가옥 보존과 연구를 기반으로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을 개관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23년 ‘박물관 및 미술관 발전유공’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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