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행정안전위원회(행안위)가 야당의 주도로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심사해 경찰의 특별활동비(특활비)를 전액 삭감했다. 기밀 유지가 필요한 정보 및 사건수사 등에 직접 쓰이는 경찰 특활비를 없애는 것은 최근 국회에서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경찰의 위장수사를 허용하는 등 경찰의 수사 범위 확대 기조와 배치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4일 정치계에 따르면 이달 20일 행안위는 야당 단독으로 경찰청 특활비 31억6000만 원을 전액 삭감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2025년도 예산안을 의결했다. 특활비와 함께 경찰국 예산 1억700만 원도 함께 날아갔다. 기동대 운영·관리 예산과 방송조명차·안전펜스 구매 예산 또한 각각 35억1400만 원, 26억4000만 원 감액됐다.
문제는 정작 경찰이 특활비를 사용해야 하는 수사의 범위가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달 14일 국회는 본회의에서 최근 딥페이크 허위 음란물 논란이 터지자 발의된 ‘성폭력 처벌법’을 찬성 272표, 반대 1표로 통과시켰다. 당초 아동·청소년 대상의 디지털 성범죄에 한해서만 가능했었던 위장수사의 범위가 성인 대상의 디지털 성범죄까지 확대된 것이다.
최근 문제가 된 텔레그램 딥페이크 사건의 경우 참여자가 다수인 대형 채팅방이 연루된 사건은 채팅방에 미성년 피해자와 성인 피해자가 혼재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경찰이 위장수사를 진행한다 해도 미성년자로 추정되는 피해자만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일 수밖에 없고 피해자가 성인으로 추정된다면 수사를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장수사 등 비밀이 유지돼야 하는 분야의 수사에 사용되던 경찰의 특활비가 전액 삭감되면서 경찰은 사비로 수사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국정감사에서 2019년 ‘N번방’ 사건을 취재한 원은지 추적단 불꽃 대표를 참고인으로 불러 경찰의 대응을 비판한 야당이 되레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경찰의 손발을 묶어버린 셈이다.
사이버범죄와 여성청소년 분야뿐만 아니라 첩보를 입수하고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해야 하는 마약범죄 수사 분야도 이번 특활비 삭감으로 타격을 크게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야당은 예산 삭감의 이유로 경찰 수사 편향성을 꼽았다. 행안위 소속 이상식 민주당 의원은 “경찰 수사의 편향성이 돔 위에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달 9일 민노총과 야당이 서울 시청에서 집회를 하면서 경찰과 충돌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조지호 경찰청장의 사과를 끌어내려는 것이 실질적인 이유로 꼽힌다.
당시 경찰은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총 11명의 집회 참가자가 현행범 체포해 연행했다. 5개 차로를 점거한채 경찰의 해산명령에 따르지 않고 방패를 든 경찰관과 철제 펜스 등을 밀치고, 경찰차 유리를 손으로 치며 위협했다는 이유에서다. 경찰은 당시 현장에서 105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야5당은 경찰이 폭력적으로 평화집회를 진압했다며 조 청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조 청장이 “불법 행위가 있었고, 이를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유지하자 야당 측은 입장문을 내고 “사과가 없을 경우 경비국의 관련 예산 전액과 특수활동경비, 특활비 등을 꼼꼼히 따지겠다”며 맞불을 놨다.
야당이 예산을 건드리자 경찰 내부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익명 게시판에 “조 청장은 절대 사과하자 말라”며 “집회 당시 폴리스라인이 공중에 날아다니고 기동대원들이 노조원들에게 짓밟혀 100명 넘는 경찰이 부상을 입었는데, 민주당 등이 예산 삭감으로 협박해 청장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 경찰 고위급 관계자는 “마약과 사이버 등 특활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분야를 두고 수사가 부실하다고 매번 지적하던 야당이 특활비를 없애겠다고 하는데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예산을 증액해도 모자를 마당에 사과를 하지 않는다고 전액 삭감을 들먹이는 이 상황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한편, 민주당은 검찰과 감사원의 특활비와 특경비 예산을 각각 586억원, 60억 원을 전액 삭감했다. 대통령실 특활비 82억 원도 마찬가지다. 반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관련한 지역화폐 발행지원 예산 등은 증액됐다.
내년도 예산안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심사를 거쳐 최종 확정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