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환경영향평가 면제 카드까지 꺼내며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일 미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때 환경영향평가를 면제해주는 법안에 서명했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반도체 프로젝트에 대해 국가환경영향정책법(NEPA)에 따른 환경평가 등을 생략하거나 완화해주는 것이다. 2022년 발효된 반도체지원법의 후속 조치인 이 법안은 지난해 12월 상원에 이어 최근 하원에서도 통과됐다. 백악관은 “환경영향평가로 인한 기업들의 반도체 프로젝트 지연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미국과 대비된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이 ‘님비(Not In My Back Yard)’로 불리는 지역이기주의에 빠져 제동을 거는 바람에 반도체 공장 가동에 필수적인 물과 전기 인프라 확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는 동서울변전소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인근 주민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며 한국전력의 변전소 옥내화 및 증설 사업의 건축 허가를 불허하고 있다. 이로 인해 600조 원 넘는 투자가 이뤄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강원도는 용인 반도체 산업 단지에 화천댐 물을 공급할 경우 물 사용료를 강원도에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9년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짓겠다고 한 반도체 공장은 토지 보상과 용수·전기 시설 문제에 발목이 잡혀 6년이나 착공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내년 3월에야 첫 삽을 뜨게 됐다. 삼성전자 평택공장은 송전선 문제로 5년을 허비하기도 했다.
주요국들은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붓는 등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국가 대항전으로 전개되는 글로벌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민관정이 ‘윈팀’이 돼서 속도전을 펼쳐야 한다. 특히 물과 전기 인프라가 제때 갖춰지지 않으면 반도체 공장을 짓고도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지자체는 과학적 근거 없이 주민들의 불안을 조장하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정부는 인프라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을 대부분 부담하고 합리적 보상책을 마련해 지자체와 주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여야는 반도체특별법·국가전력망확충특별법 등을 조속히 처리해 전략산업 경쟁력 제고를 뒷받침해야 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