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거실에서 TV가 사라졌다. TV가 고장 난 것이 일차적인 이유지만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거실을 서재로 만들자는 아내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아내의 속내는 퇴근 후나 주말·휴일에 소파에 널브러져 스포츠 중계를 보는 남편의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였을 게다. 처음에는 다소 불편했으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뉴스나 스포츠 중계는 스마트폰을 통해 시청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집에 TV 수상기가 없으니 한국방송(KBS) 수신료를 내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TV 수신료 강제징수를 폐지했을 때 심드렁했던 이유다.
TV 수신료 강제징수를 폐지하고 분리 징수하기로 한 것은 시대적 흐름과 부합한다. 지상파만 있던 과거와 달리 방송 환경과 시청 패턴이 크게 바뀐 데다 준조세처럼 부과되던 TV 수신료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국민적 요구와 함께 KBS의 ‘방만 경영 개선’을 수신료 징수 방식 개선 이유로 내세웠지만 속내는 ‘방송 길들이기’ 차원이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KBS의 방만 경영을 개선하려면 유휴 인력을 내보내고 투자를 늘려 프로그램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정석이다. 결국 논란 속에 임기가 남은 사장이 물러났고 보수 언론 출신이 새 사장에 임명되면서 KBS에서도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노노 갈등 속에 조직이 안으로 곪아 들어가면서 국가 기간 재난 방송사인 KBS가 ‘재난’ 상황에 처했다는 게 언론계의 중론이다.
다음 차례는 문화방송(MBC)이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과 이사진을 교체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야당은 MBC 사장 교체를 막기 위해 방문진 이사진 선임 절차를 진행한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한 탄핵을 추진했고, 위원장이 자진 사퇴한 뒤 홀로 남은 위원장 직무대행마저도 탄핵소추안 발의 전에 물러나면서 방통위는 상임위원이 1명도 없는 ‘식물 위원회’로 전락했다. 야당은 새 위원장 후보자에 대해 사퇴를 종용하는 한편 취임할 경우 탄핵을 추진할 것임을 공언한 상태이고 정부는 위원장 임명과 방문진 이사회 개편을 강행할 태세다. 이 와중에 국회에서 야당 주도로 공영방송 이사회 인적 구성을 확대하는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여당은 필리버스터로 맞서는 등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을 둘러싸고 사생결단식의 극한 대결을 벌이고 있다. 여야는 저마다 ‘공영방송 정상화’와 ‘방송 장악 저지’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국민들은 ‘MBC를 내 편으로 만들거나 네 편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민주화 이후 정권 교체가 이뤄질 때마다 공영방송은 몸살을 앓았다. 진보·보수 정부 할 것 없이 정권에 우호적인 인사를 공영방송 사장에 앉히고 좌지우지하려 들었고 그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행태가 반복됐다. ‘시용 기자’가 채용되고 ‘아이스링크 기자’가 생겨났다. 관변 언론학자들은 자신들의 성향대로 곡학아세하면서 공영방송 이사회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공영방송 거버넌스 개선과 정체성 재확립을 위한 논의에 영국의 BBC와 일본의 NHK가 자주 호출됐지만 잿밥에 대한 관심 속에 매번 공염불에 그쳤다. 그 사이 종합편성채널이 생겨나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소셜미디어로 시청자가 옮겨가면서 지상파 채널의 영향력이 급전직하했다. 자루가 썩어가고 날도 무뎌졌는데 공영방송이라는 ‘도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의 습성이 딱하다.
서로에 대한 비토를 반복하는 현 권력 구조에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바라는 것이 무망하다. 당파성이 짙어진 시민사회 영역에서 공론장이 형성될 리도 만무하다. 그렇다고 공공재인 지상파를 사용하는 공영방송이 정쟁의 무한 루프 속에서 망가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영방송이 ‘권영(權營)방송’과 ‘노영(勞營)방송’이라는 오명을 벗고 공공성을 회복·강화하려면 정치권의 의지, 방송 종사자들의 각성, 국민들의 지지가 함께해야 한다.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 후보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합의하고 승패를 떠나 실행하도록 하는 것은 어떤가. 이 또한 공허한 메아리인 줄 알면서도 매번 똑같은 곳에서 넘어지는 행태가 안타깝고 한심해서 해본 소리다. 거실에 TV가 없으니 세상 조용하고 평화롭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