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다중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이어 대만해협과 한반도 등에서도 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희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는 오준 전 유엔대사는 22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화와 포퓰리즘 확산 등으로 국제 관계에서 개별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며 “그럴수록 국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인 무력 사용에 점점 더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 핵무기에 대해 한미 동맹이나 한미일 안보 협력으로 대응한다는 윤석열 정부 안보 정책의 기본 방향은 맞다”며 “한반도에서도 무력 사용 가능성에 대비하면서 북한과의 대립 관계가 오버슈팅(과열)되지 않도록 외교안보 정책을 정교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도전하고 있는데.
△30년 전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논문에서 앞으로는 이념이 아닌 문화적 이질성이 국가 간 분쟁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승리함으로써 체제 경쟁은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냉전 종식이라는 큰 역사적 해프닝을 보고 국제 관계 흐름을 단순하게 진단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국제 관계 현실은 훨씬 더 복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제 질서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 것으로 보는가.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산이다. 민주국가의 숫자는 지난 40년 동안 부분적 민주국가를 포함해 2배로 늘어 이제 전 세계 국가의 70% 정도를 차지한다. 둘째,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국제 관계에서 점점 더 많아진다는 점이다. 기후위기, 디지털 혁명, 대유행병 등 세계화 시대의 지구적 과제들은 어느 국가도 혼자 대응할 수 없다. 민주주의 확산으로 포퓰리즘도 널리 퍼지면서 반드시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여론의 지배가 커졌다. 이 때문에 국가 과제의 우선순위도 정권 교체나 여론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셋째, 앞서 말한 이유들로 인해 국가에 의한 무력 사용이 증대되고 있다.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아지면서 외려 무력 사용이 늘고 있다는 얘기인데.
△9·11 테러 때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했다. 과거와 달리 분명한 적국이 있는 게 아니니까 일방적으로 보이지만 무력 사용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입장에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화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미 민주화되고 있는 우크라이나로서도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집권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전개와 싸워야 하는 국가들은 전가의 보도인 무력 사용 이외에 별 대안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전쟁의 시대가 끝났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한반도에서도 무력 사용 가능성에 대비하면서 어떻게 하면 한반도 평화, 나아가 국제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지 모색해야 한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 구도 등으로 신냉전 체제가 도래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중국을 북중러의 일원으로 동시에 취급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분석이다. 중국은 북한이나 러시아보다 훨씬 더 개방돼 있고 대외 의존도가 높다. 중국이 북러와 힘을 합쳐 한미일에 대항하는 구도를 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최소한 경제 분야에서는 각을 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진영 간의 대립 구도는 신냉전 국제 질서의 형성 과정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와 인권 확산 과정에서의 갈등과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보고 싶다.
-우리나라 외교안보 전략의 큰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국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민주주의국가이다. 강대국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는 국가 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 글로벌 거버넌스를 강화하고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국익에도 맞다. 이를 위해서도 민주주의 세력의 단합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의 상세한 외교 전략으로 들어가면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기만 한다고 이러한 목적에 부합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한미 간 이해관계가 다를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문재인 정부에서 한미 동맹, 한미일 관계가 약화되자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가 강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현 정부 들어 그런 우려가 해소됐다는 점에 대해 만족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한미 관계에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통상 갈등, 미국의 대중 견제 과정에서 우리 기업의 불이익 등은 풀어야 할 문제이다. 다만 한미 동맹에 대한 신뢰가 강화됐기 때문에 개별 현안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외교 관계는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중국이 한미 동맹 강화에 대해 불만은 있겠지만 지금쯤은 새로운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양국 관계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현실적인 관계 재정립이 이뤄질 것이다. 지금 중국은 부동산 침체, 미국의 견제 등으로 경제위기를 겪고 있어서 과거 사드 사태 때처럼 경제 관계를 정치적 보복 수단으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애매한 줄타기를 하는 것보다는 중국에 한미 동맹은 불변의 기조라는 점을, 미국에는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편하게 외교를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22일 밤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감행했는데.
△정찰위성을 쏘는 데 필요한 기술은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쓰이는 기술과 같다. 한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가 우려하고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국제사회 차원에서 공동 대응하고 한미 안보 동맹 강화 등을 통해 추가적인 군사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 9·19 남북 군사 합의 중 일부 조항을 효력 정지하고 향후 도발 수위에 따라 단계적으로 효력을 정지한다는 정부 방안은 미국과 협의를 거쳐 나온 대응이라고 본다. 북한의 도발에 대응 카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을 전반적으로 평가한다면.
△문재인 정부의 외교 정책에는 편향 현상이 있었다. 즉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모든 외교 정책에 영향을 주는 ‘크로스커팅(crosscutting)’ 이슈였다. 그렇게 보면 현 정부가 전임 정부의 외교 정책을 수정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한쪽에 치우친 외교 정책 방향을 균형으로 돌려놓으면 되니까. 하지만 전임 정부와 반대로만 한다고 잘 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과의 관계를 대립 일변도로 간다면 오버슈팅이 생긴다. 앞서 말한 대로 국가들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대항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대북 경제 지원을 한다고 해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것 같지는 않은데.
△김정은 정권도 경제 발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강압으로 주민들의 불만을 누르기만 한다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럴 때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전폭적인 경제적 지원과 협력을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 이른바 ‘채찍과 당근’ 전략이 필요하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도 핵 포기를 대가로 경제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나.
△문 정부는 북핵 문제 해소보다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 자체에 집중했다. 북한에 대가를 제시함으로써 핵을 포기하도록 유도한 것이 아니고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북한 스스로 핵무장 필요성이 없어질 것으로 보았다. 당근을 먼저 주면 굳이 채찍을 들지 않아도 말이 움직일 것으로 본 것이다. 결국 2018년 9·19 평양 공동 선언 등에서 비핵화 의지를 구두로 표명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구체적인 비핵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하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협상이 깨져 버렸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핵무기를 독자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핵 확산을 막으려는 5대 핵 보유국, 즉 미국을 포함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이 절대로 한국의 핵무기 독자 개발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가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진지한 의도를 보일 경우 경제 제재, 핵물질 제공 중단 등 저지할 수 있는 여러 수단을 갖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대만의 핵무장도 허용할 정도로 동아시아 전략이 바뀔 때만 가능하다. 글로벌 차원의 비핵화 전략 변화가 없으면 불가능한 얘기다. 현 정부가 한미 동맹 강화를 통해 핵우산(확장 억제)을 강화했는데 그 정도가 우리 입장에서는 현실적 대안이라고 본다.
◆He is…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국제 정책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싱가포르 대사, 유엔 대표부 대사,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 이사장과 한국아동단체협의회 회장,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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