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개혁의 요체는 연금 혜택을 줄이고 연금 부담을 늘리는 것이다. 연금 개혁이 국민 대다수의 고통을 수반하는 이유다. 웬만해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그럼에도 대다수 선진국은 정치적 명운을 걸고 고통의 연금 개혁을 결단했다. 국민들은 왜 고통의 연금 개혁을 끝내 동의하고 수용할 수 있었는가. 연금 개혁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2023년 대한민국에 필요한 질문이다.
그 답은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에 대한 역사적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받는 연금 혜택을 다음 세대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세대 공생 의식에서 출발한다. 자연스러운 자기중심적 이해에 기반한 판단을 뒤로하고 세대 공생 의식을 앞세워 연금 개혁의 고통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게 한 마법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지속 가능성이라는 거대 담론을 개인적 서사가 담긴 미시 담론으로 바꿔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내가 연금보험료 인상에 빠르게 동참해야만 내 자녀의 연금보험료 부담이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내 자녀도 안심하고 연금을 누릴 수 있다는 서사다. 또 인간의 연민에 기반한 노인 빈곤에 대한 공감대도 연금 개혁의 개인적 서사를 구성할 수 있다. 거대 어젠다인 연금 개혁의 비전을 개인이 사랑하고 염려하는 연결된 관계 속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해석해줄 수 있다. 이로써 사람들에게 연금은 더 이상 국가가 내게 지켜야 할 굳은 약속이 아니라 나와 내 자녀, 내 부모, 내 이웃의 관계 속에서 상생의 관점으로 유연하게 조율하고 보호해야 할 생명체로 탈바꿈한다.
우리 모두는 연결돼 있다. 내 결정과 행동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각성시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 좁은 경제적 이해를 넘어서서 관계를 고려한 비합리적인 선의의 결정을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새뮤얼 볼스가 그의 저서 ‘도덕경제학’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정부는 경제적 인센티브를 넘어 도덕적 동기에 입각한 이타적 행동을 자극하는 넛지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리해야 한다. 그래야 선한 시민의 지지를 받아 연금 개혁의 성공을 이끌 수 있다.
9월 초 국민연금 제5차 재정계산위원회는 재정 추계 결과에 기반해 18개 국민연금 개혁 랜드마크를 발표했다. 소득보장안이 빠진 반쪽 개혁안이라고 폄하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는 애써 축적하고 있는 연금 개혁의 사회적 에너지를 흩어버리는 것이다. 청년 세대의 연금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연금 개혁의 무게중심이 지속 가능성에 실리는 것은 불가피하다. 연금의 보장성과 관련해 현 노령층의 빈곤 문제는 기초연금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또 기본 보장에 위협을 받는 여성과 불안정 근로층의 연금 보장을 위해 더욱 중요한 것은 개혁 방안에 이미 포함된 연금 가입 기간 확보 지원 등 조치다.
우리에게 절박한 연금 개혁을 위해서는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연금 개혁을 머뭇거리기보다는 연금 개혁의 정치 공간 속에서 용감하고 정의로운 연금 정치를 성공적으로 조율해낸다면 그것은 정치적 자산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뢰 자산의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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