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집권 5년간 국정을 하나의 거대한 쇼처럼 운영했다. 문 대통령의 첫 대외 일정으로 인천공항공사에서 ‘비정규직 제로’ 선언, 와이셔츠를 입은 대통령과 참모진의 테이크 아웃 커피 산책,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판문점 도보다리 산책, 대통령이 직접 오송을 찾아가 정은경 초대 질병관리청장에게 임명장 수여 등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친근하면서도 감성적인 대통령의 모습에 국민 지지율은 고공 행진했다.
하지만 지나친 이벤트가 오히려 정권의 민낯을 까발린 경우도 많았다. 문 대통령이 2021년 10월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의 발사 참관을 마치고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연구원들은 허전한 뒷배경을 채울 병풍으로 동원됐다. 10여 년 동안 누리호 발사에 헌신했던 과학자들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통령의 들러리로 전락한 셈이었다. 기업인과 과학기술인을 경시하는 ‘586세대’ 특유의 선민의식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전후만 해도 벤처 사업가 출신의 안철수 의원에게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맡기고 과학기술을 국정과제 우선 순위에 올렸다. 또 총지출 대비 연구개발(R&D) 예산 비중을 5%대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당초 정부도 내년 R&D 예산을 올해보다 2% 늘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R&D 예산은 25조 9152억 원으로 올해보다 16.6% 삭감됐다. 국가 R&D 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1964년 정부 통계 작성 이후 처음이다.
정부가 왜 태도를 바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6월 28일 “나눠 먹기, 갈라 먹기식 R&D는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 유추해볼 뿐이다. 세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R&D 예산 집행을 효율화하겠다는 데 이의를 달 과학자는 별로 없다고 본다. 과학자들도 유사 중복 연구 지원 등으로 효율성이 떨어지고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장기 개혁의 밑그림을 제대로 제시하지도 않고 불과 두 달도 안 돼 예산안을 만든 탓인지 곳곳에 예산 삭감의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이권 카르텔’과는 별로 관련 없는 기초 연구비가 6.2% 삭감된 게 단적인 사례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국가 핵심 연구 인프라 도구인 슈퍼컴퓨터를 정상 운영하기 어려운 처지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 또 정부조차 카르텔의 정체와 나눠 주기식 R&D 사업의 개혁 방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상당수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힘 없고 만만한 연구자들을 긴축 재정의 희생양으로 삼고 개별 R&D 사업의 효율성을 꼼꼼히 따지지 않은 채 총량부터 깎았다고 의심하고 있다.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카르텔이 있다면 그 부분만 도려내면 되지 다른 중요한 부분들은 왜 칼질하느냐”는 반발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지면 민간 기업보다 연구 환경이 열악한 국책연구소에서 연구 인력이 이탈할 게 뻔하다. 또 이공계 진학 기피도 심화하고 해외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과학자들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연구원들이 동요하자 한덕수 국무총리 등은 “R&D를 효율화해 젊은 학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며 달래기에 부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학생 연구원의 인건비 삭감, 연구 사업 수주 경쟁 등을 불러올 것이라며 현장을 모르는 발언이라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5년 “우리나라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말했다. 지난 30년간 정부와 정치권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2023년 국가경쟁력 조사에 따르면 한국 정부 효율은 64개국 가운데 38위다. 선진국 중 꼴찌 수준이다. 반면 한국의 과학 인프라 순위는 미국에 이어 2위다. R&D 인력, 과학 분야 논문 수, 중간·첨단 산업의 부가가치 비중 등 세부 항목이 고루 상위권에 포진한 결과다. 일각에서는 노벨과학상 하나 못 받는다고 비아냥거리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선진국에 진입한 것은 과학기술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정부는 R&D 예산안 개혁을 내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계의 신뢰와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앞으로 예산안 국회 심의와 확정, 예산 배분 과정에서 현장과의 소통을 통해 과학기술인의 사기가 더 떨어지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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