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 당사자로서 제 권리를 찾고자 인권 운동을 하고 있지만 제 꿈이 인권 운동가는 아니에요. 저도 꿈이 있고 어릴 때부터 그 꿈은 창작자였죠. 젊은 날 찾아온 정신장애로 꿈이 좌절된 시간이 길었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인생은 작가로 살고 싶다고 매일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 회사의 촉망받던 아트 디렉터로 살던 20대 후반, 갑작스럽게 찾아온 조현병으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정하(사진) 작가는 20여 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다시 붓을 잡았다. 혼자만의 작업은 아니다. 조현병과 중증 우울증 등 정신장애를 겪는 당사자들이 중심이 돼 2017년 설립한 공동체 ‘사단법인 정신장애와 인권 파도손’ 회원들과 함께다. 이 작가는 파도손의 설립자이자 초대 대표를 맡고 있다.
“정신장애와 예술적 창의성이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있듯이 실제 제 주변 정신장애 당사자들을 봐도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아요. 우리 삶이 발병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면, 그래서 또 다른 삶의 이정표를 찾아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더 늦기 전에 그림을 그리자고 의기투합했죠.”
이 작가는 과거 수개월간 잠 한번 푹 못 잤던 가혹한 업무 환경 속에서 환청·환각을 주요 증상으로 하는 조현병을 진단받았다. 처음에는 약을 먹어가며 계속 일을 했지만 환청과 환각이 심해져 서른 살에 결국 가족의 손으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했다. 이후 20년 가까이 여덟 번이나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피폐해졌다.
“증상이 나타나서 약을 먹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 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나에게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건지, 그건 저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고 조절할 수 없는 증상은 공포의 대상이었죠.”
고통스럽기만 하던 나날들이 조금씩 평온해지기 시작한 것은 스스로의 병을 드러내고 인권 운동을 하면서다. 병에 대해 공부하고 정보를 얻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경험이 그를 살렸다. 고립됐던 삶이 밖으로 열리며 삶의 잃어버린 조각들이 하나둘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8년, 다시 그림을 그려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전에도 종종 낙서를 한다거나 그림을 끄적이는 일은 있었는데 2018년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그림과 글을 묶은 그림책을 발간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해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더 늦어지기 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자”고 결심했다.
이 작가는 하나씩 그려낸 작품을 모아 지난해 첫 전시를 열었다. 올해도 6월부터 파도손의 회원인 최준석 작가와 함께 국립정신건강센터가 운영하는 갤러리M에서 ‘마음을 그리다Ⅰ’전을 열고 있다. 공개된 작품들은 여느 예술이 그렇듯 하나하나 의미가 깊다. 일례로 작품 ‘우리 여기에 있다’는 파도손이 위치한 서울 을지로 인쇄 골목의 풍경을 세밀한 펜화로 표현했다. 이 작가는 “이곳에서 우리 당사자들은 지역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사회의 평범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전국이 이곳 을지로 인쇄 골목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공간을 그리게 됐다”고 했다. 또 ‘못다 한 이야기’라는 작품은 정신장애라는 족쇄 탓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마음의 풍경을 그려냈고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바라본 용마산’은 “이곳에 입원한 당사자만이 그려낼 수 있는 풍경”이라며 웃었다.
이 작가는 올해의 경우 파도손이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을 받게 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며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사회가 좀 더 정신장애인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순수하게 창작을 하고 싶다는 욕망과는 별개로 우리가 하는 예술을 통해 우리 사회가 정신장애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 편견을 조금이라도 깰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겠다”고 했다.
“사람을 딱 정해놓고 넌 장애인, 넌 비장애인 이렇게 태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나 좀 아플 수가 있어요. 몸이든, 마음이든. 소수자 운동이라는 건 결국 전 국민의 삶의 영역에서 마지막 안전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자 운동이 소수자를 넘어설 수 있을 때 우리 사회가 한발 더 나아가는 게 아닐까요.”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