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접근했다가 된통 당한 영화가 '야차'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가볍게, 통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였으면 했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처음 글로벌 관객과 만난 설경구 배우는 담담했다. 호성적을 얻고 있는 터라, 속편 제작에 대한 기대감을 묻는 질문에 "제 성격 상 말씀드릴 수 없다"라고 말을 아꼈다. 대놓고 '정의'를 말하는 영화이지만, 배우 개인으로서는 그냥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이길 바랐다는 솔직한 마음도 내비쳤다. '야차' 외에도 여러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설경구 배우를 만나 작품 '야차'와 '지강인'이란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인터뷰는 12일 오후 화상으로 이뤄졌다.
"세트장 하나에 워낙 예산이 많이 들어가서 철수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죠. 미루고 미루다 진짜 더 이상 미루면 안 되는 날 밤에 겨우 촬영을 마쳤던 적도 있었습니다. 온갖 곳들에서 찍은 장면이 한 장면처럼 보여지는 걸 영화에서 봤는데, 그러기도 힘들었을 텐데 정말 감독님과 스태프 분들이 잘 계산해서 연출하신 것 같습니다."
'야차'는 원래 넷플릭스가 아닌 극장 개봉을 준비하고 있던 영화였다. 북한 최인접 지역이자 중국 동북부 최대 도시 선양에서 벌어지는 글로벌 첩보 전쟁이라는 대형 스케일에 맞춰 모든 일정을 세워뒀지만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세트장은 봉쇄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대만과 한국 여러 지역에서 촬영한 장면들을 엮어 마치 한 장소에서 찍은 듯이 엮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힘든 상황을 뚫고서 볼거리 풍부한 영화를 완성해냈지만 '야차'는 극장이 아닌 넷플릭스행을 택했다. 설경구 배우는 극장의 대형 화면이 아닌 스마트폰 화면으로 관객과 만나는 환경이 조금은 낯선 모습이었다. 영화 음향이나 효과 같은 것들이 작은 화면 속에서는 잘 보여지지 않으니 아쉬움도 컸다고, 이왕이면 큰 화면으로 보기를 추천한다는 그였다. '넷플릭스 개봉'에 대한 기대감 보다는 아쉬움이 더욱 커 보였다.
"(OTT 플랫폼으로 공개되면) 개봉에 대한 부담 없이 오롯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겠죠. 극장 개봉하는 영화는 흥행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지만 그건 숙명인 것이고요. 제가 영화 일만 25년 했는데, 그 사이에 세상이 너무나 빨리 바뀌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가 더 앞당긴 것 같아요. 극장 개봉작으로 준비한 영화여서 저도 아쉽지만 감독님도 아쉬울 것 같아요."
■ 설경구, “서글픈 사람들의 첩보 영화…<실미도>와도 접점 있어”
흔히 첩보물이라고 하면 스파이들의 위트있고 멋진 모습들이 먼저 떠오른다. 첩보 영화는 오랫동안 헐리우드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그래도 지정학적으로 북한과 오랜 대치 중인 한국에서 첩보 영화는 종종 만들어져온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야차'가 갖고 있는 차별점은 무엇일까.
"저한테는 '야차'가 되게 서글픈 사람들의 첩보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로부터의 계획된 배신, 사라져도 존재가 없는 '아픈' 사람들의 첩보 영화이죠. 그럼에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어찌보면 영화 '실미도'와도 접점이 있겠네요."
문득, 배우 인생 30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한 획을 그었던 작품 '실미도'를 언급했다. '야차'라는 별명을 얻게 된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설경구 배우가 접근한 지강인이라는 캐릭터는 원래는 '직업'으로 시작됐을 거라고 봤다. 그러나 믿었던 팀원에게 배신당하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자기 팀원들에게 돌아오는 걸 겪으면서 더욱 냉철해지고 독해졌던 면이 있었을 거란 해석이다. 거기서 자신이 연기했던 영화 '실미도'의 강인찬도 겹쳐보였다.
"비밀 조직이라는 것이 국가와 단절된 조직이거든요. 정보원은 죽어서도 자신의 신분이 밝혀져선 안 되는 서글픔이 있죠. 그리고 절박함이 있죠. 너무 아끼는 사람이었어도 나머지 팀원을 살리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그런 일들을 계속 겪어오면서 지강인은 독해질 수 밖에 없는 인물이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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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 전 실제 정보기관에 견학을 다녀오기도 했다는 설경구 배우. 처음 책(시나리오)을 읽었을 땐 '영화니까 가능하겠지' 싶었던 장면들도 실제 설명을 듣고 나니 "이런 설정이 가능하겠다"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 속 북한 여성 정보요원(진서연 배우)과의 묘한 관계 역시 아프고 서글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어서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고.
■ ‘야차’는 한지훈 검사의 성장기? “지강인 역시 성장했다"
한편 '야차'에서 지강인은 자신을 감시하러 온 한지훈 검사(박해수 배우)를 만나 신념으로 부딪힌다. 설경구 배우가 제작발표회 때 말한대로, 이 영화는 한지훈 검사의 성장사인 듯 보이기도 한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던 한지훈이 선양에서 지강인을 만나고, 다른 인생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버디 무비'라고 한다면, 지강인이 한지훈에게서 배운 점도 있을 터. 지강인에게 한지훈은 어떤 존재였을까.
"지강인은 작전 현장에서 처음 한지훈을 보는데, 쫓아내지 않고 방탄복을 입혀요. 또 실컷 두들겨 패 놓더니 자기 이야기를 하고요. 지강인은 한지훈을 처음부터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어떤 인물인지, '난 널 다 알아' 이렇게 말하죠. 호감이 갔던 거죠. '정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인물이잖아요. 괜히 끌리는 사람."
지강인은 작전 수행 도중 한지훈에게 "네 방식대로 해봐, 너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지강인의 방식이 아닌 한지훈의 방식을 따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를 설경구 배우는 "알게 모르게 지강인 역시 한지훈에게 스며들었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누군가는 '야차'를 보고 이렇게 분석하기도 했다. 블랙팀 요원 4명의 캐릭터를 합치면 지강인 팀장이 되고, 지강인을 넷으로 쪼개면 블랙팀 요원이 된다고. 네 명의 블랙팀 요원 캐릭터마다 다혈질, 책임감, 인간미 등 다양한 개성이 묻어나는데 지강인이란 한 인물 안에서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설경구 배우 역시 이 같은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놨다.
"어느정도는 동의해요. 블랙팀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지강인이고, 설경구이죠. 다혈질이기도 하고 책임감도 있고, 진중하면서도 인간미 있는. 그 만으로도 저한테는 벅찼습니다. 다만 조금 더 불안한 인물로 보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아요.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캐릭터였다면 조금 더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캐릭터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액션 배우로서는 도전이었다. '불한당' 이후 한동안 액션 연기를 잘 못 보였던 그였다. 하지만 '야차' 이후로 차기작에서도 액션 신을 조금씩 선보이는 등 자신감이 어느 정도 붙은 듯 했다. '킹메이커' 변성현 감독과 현재 촬영 중인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도, 이해영 감독 영화 '유령'에서도 액션 신을 선보일 예정이다. 설경구는 내년이면 1993년 연극 무대 첫 데뷔 이후 배우 인생 30주년을 맞는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박하사탕'(1999)은 20년이 지나도 회자되는 명화로 남았다. 넷플릭스를 통해 전세계에 공개된 영화 '야차'는 그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게 될까.
"거대한 포부 같은 건 없습니다. 그냥 가볍게, 보시는 분들이 좋아하시고, 즐기시고, 통쾌해하는 작품이길 바랍니다. 다른 작품들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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