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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항 대운하 종점서 서민적 쇼핑가로…베이징 900년 역사를 품다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20·끝> ‘라오바이싱의 낙원’ 스차하이

베이징 도심내 물길로 이어진 3개 호수

금나라가 수도 건설하며 처음 만들어

원나라때 대운하 연결로 최고 번성기

지금은 상업지로 카페·기념품점 즐비

전통골목 후퉁엔 古건물 등 옛정취 물씬

서민들 문화생활 즐기고 관광객 줄이어

중국 베이징의 스차하이에서 시민들이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호숫가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풍경을 만끽하고 있다. 스차하이는 베이징 라오바이싱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휴양지이자 쇼핑가다.




강수량이 서울의 3분의 1일 정도로 건조한 중국 베이징은 도심에 크고 작은 호수가 많이 만들어져 있어 그나마 삭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데 그중에서도 ‘스차하이(什刹海·십찰해)’가 가장 유명하다. 원래 인근에 사찰(刹) 10곳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큰 호수를 바다(海)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인들의 언어 습관이다.

수역 면적이 33만㎡인 스차하이는 3개의 큰 호수로 이뤄져 있다. 남북으로 전해와 후해, 서해가 있는데 이는 서로 물길로 이어진다. 스차하이 호수 주위로 늘어선 가로수들 아래에는 공연장, 라이브 카페, 음식점, 기념품점들이 즐비하다.

사람들은 스차하이에서 배를 타거나 직접 수영을 하고 또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많다. 베이징 시민들이 가장 가까이서 저렴하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라오바이싱(老百姓·일반 서민)의 낙원’인 셈이다.

또 한 발짝 안쪽으로 들어가면 베이징의 전통 골목길인 후퉁이 모세혈관처럼 펼쳐진다. 이곳은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일상생활을 즐기는 지역 주민들도 외부인에게 거리낌이 없다.

스차하이의 역사는 바로 베이징의 역사다. 사실 여기는 베이징보다 더 오래됐다. 스차하이가 처음 만들어진 때는 약 900년 전이다. 즉 스차하이의 바탕 위에서 현재의 베이징이 건설됐다는 의미다. 스차하이는 항저우에서 베이징을 잇는 경항(京杭)대운하의 베이징 구간 종점으로 번성했다. 지금은 베이징의 대표적인 쇼핑가이자 관광지로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스차하이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수도 ‘중도’를 여기 베이징에 두면서다. 만주에서 일어난 금나라는 지난 1127년 송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수도인 카이펑을 약탈했는데 이때 카이펑의 구조에 주목했다. 카이펑의 왕궁 동북쪽에 호수를 만들고 귀족들이 향락을 즐겼던 것이다. 여진족은 수도를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는데 카이펑을 본떠 만든 호수가 스차하이의 초기 모습이다.

이후 몽골족의 원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대도’라는 이름을 붙여 대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베이징의 시작이다. 이때 스차하이는 신생 대도성의 중심축으로 기능했다. 스차하이 자체도 중요한 용수 공급지이자 휴양지였다.

원나라는 대운하를 베이징까지 연결하면서 스차하이를 종착지로 삼았다. 대운하는 베이징 동부의 퉁저우에서 큰 강으로부터 갈라져 인공 수로가 된다. 스차하이 호숫가에는 창고들이 가득해 각지에서 실어 온 물자를 부려놓았다. 스차하이의 최고 흥행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원나라에 이어 베이징을 수도로 그대로 삼은 한족의 명나라 때는 스차하이의 용도가 다소 변한다. 명나라는 운하의 배들이 베이징성 안인 스차하이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대신 성 밖인 조양문 인근에 짐을 부렸다. 대신 스차하이는 본격적으로 상업 지구로 각광을 받는다.



스차하이 후해의 모습. 가로수들 사이로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스차하이가 상업 지대로 뜬 것은 베이징성의 구조 때문이다. 베이징성은 남쪽 부분이 자금성으로 막혀 있다. 성안 주민들이 교류하기 위해서는 자금성 북쪽으로 돌아야 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이 스차하이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만주족의 청나라 때도 이런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청나라 때는 한족을 베이징성(내성)으로부터 외성으로 몰아내면서 지금의 정양문 앞인 첸먼다제(전문대가)가 한때 번성했지만 스차하이의 중요성도 여전했다.

베이징에 남북으로 걸쳐진 호수 가운데 남쪽 북해·중해·남해가 ‘황성’에 포함되며 귀족들의 배타적 구역이었던 반면 북쪽 전해·후해·서해로 이뤄진 스차하이는 서민 지역이었다. 현재도 중해·남해(합쳐서 중난하이)는 공산당 수뇌부의 거주지로 통제되고 있다. 북해는 유료 공원이다. 반면 스차하이는 24시간 사방이 열려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남아 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스차하이는 다시 한족들이 모여들고 상업 지구로 부활하게 된다. 공산당 치하에서 정치적으로 변한 베이징 남부를 대신해서 보다 서민적인 모습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또 스차하이는 전통 건축물의 보고다. 대형 건물로는 공왕부와 순왕부(현재는 송경령고거) 등이 있고 이외에 후퉁이 이어져 있어 베이징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전해와 후해의 연결 지점에 있는 다리인 은정교에 서면 스차하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은정교에서는 베이징의 서산들이 보였다고 하며 이를 상징하는 ‘은정관산(銀錠觀山)’이라는 석비가 다리 옆에 세워져 있다.

700여 년 전 원나라 때 건설된 만녕교가 지금도 시내 도로로 사용되고 있다. 아래에 튀어나온 돌들이 운하의 갑문 흔적이다.


스차하이의 대운하 유적지로 대표적인 곳이 만녕교다. 전해의 동쪽 부분에 운하 수로의 입구가 있는데 위를 지나는 다리가 만녕교다. 최근 대대적인 보수를 했지만 원래 원나라 때인 1285년에 세운 다리다.

베이징 운하는 지형 때문에 여러 개의 갑문을 설치했는데 갑문 1번 유적이 이 다리 아래 있다. 아쉽게도 운하 자체는 시내로 연결되는 부분이 막혀 있다.

/글·사진(베이징)=최수문 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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