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을 두고 수집한 문화재 및 미술품 중 2만3,000여 점을 국가기관 및 지자체 공공미술관에 내놓은 ‘세기의 기증’과 일명 ‘이건희 컬렉션’이 주목을 끈 후, 컬렉션과 수집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많은 비용을 들인 고가의 수집품을 컬렉션이라 여기던 것에서, 지속적인 수집활동이 만드는 의미와 그 안에 쌓이는 개인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은밀하고 사적(私的)인 사연이 담긴 수집품들을 공개하는 독특한 전시가 열려 눈길을 끈다.
작은 초록색 조각들이 에메랄드처럼 반짝인다. 시각예술가 겸 영화감독 장민승은 수년 전 제주도에 머무를 때, 바닷가에서 발견한 ‘이것들’에 매료됐다. 마모된 돌인가 싶었지만 실제는 소주병 조각이었다. 제주의 지역소주 ‘한라산’ 병이 예전에는 옅은 녹색이었다고 한다. 장 작가는 “오래전 바닷가에서 누군가 소주를 마시고 버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소주를 마신 이의 사연은 제각각이었을 것이고, 파도에 깨져 날카롭던 병 조각은 해변의 돌과 부딪히며 물방울 모양으로 변해갔다”면서 “시간의 형상화를 발견했기에 제주도를 돌며 소주병 조각을 수집했고, 유난히 슬픔과 눈물을 많이 겪었던 제주도 사람들의 사연을 수집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지는 아직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책장을 넘기니 신데렐라의 무도회가 열린 화려한 성이 솟아 오르고, 오즈의 마법사가 튀어나온다. 1m는 됨직한 대형 선박이 펼쳐지는가 하면, 일본 우키요에(浮世畵)의 대표작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커다란 파도가 넘실댄다. 진귀한 팝업북의 주인은 독립출판사 대표인 유영준 씨. 도서전 출장에서 만난 팝업북의 대가 로버트 사부다의 작품에서 충격을 받아 16년째 팝업북을 수집해 왔고 현재 450권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수집품은 서울 중구 신당동 공간타이프에서 오는 7월12일까지 ‘오픈 더 캐비넷’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다. 예술가·건축가·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 10명 대부분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컬렉션을 공개했다.
서승모 건축가는 특이한 디자인의 요리도구를 수집했고, 오상훈 건축가는 공모전에서 당선되지 못한 지난 20년의 프로젝트를 기록한 수십 권의 몰스킨 노트와 페이퍼워크(종이모형) 작품들을 모았다. 독립기획자 김정연 씨는 어릴 적 부모와 함께 한 첫 여행의 기념품으로 ‘거북이 가족’을 택한 이후 세계 여러 도시를 출장다닐 때마다 거북 인형을 사 들였고, 작가 이영림은 1세대 목공예 연구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소반들을 컬렉션 했다. 수집품들은 취향의 반영이자 개인의 특별한 역사를 반영한다. 가로·세로 100㎝로 균일한 흰색 입방체 안에 각자의 컬렉션을 전시해 개성있는 수집품 모두가 차별없이 귀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도 이 전시의 특징이다. 기획자 이승아 유아트랩대표는 “수집품을 개별적 사물로 본다면 가치나 희소성에서 특별할 것 없지만 그 많은 것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유럽에서 16세기경 등장한 ‘호기심의 방(Cabinet of Wonders)’은 희귀 동식물 표본 수집에서 시작해 근대적 박물관·미술관 탄생의 근간이 됐고, 경제적 가치를 넘어 필요 없는 사물을 수집하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좋은 사례다”면서 “21세기의 현대인들의 수집활동은 시계·자동차 같은 럭셔리 제품과 미술품을 비롯해 한정판 운동화까지 다양해지면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다른 이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게 남다르다”고 덧붙였다.
한편 원로 컬렉터들의 사회환원과 기여도 줄을 잇는다. 대우전자 사장을 지낸 김용원 도서출판 삶과꿈 대표와 부인인 성악가 신갑순 여사는 미술품 컬렉션을 포함한 종로구 평창동 자택 ‘운심석면’을 공공 미술관으로 내놓기로 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인 이근배 시인은 평생을 두고 수집한 문화재급 벼루 100여점을 가나문화재단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했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컬렉션 전시를 열기도 했던 미술품 수집가 문웅 전 호서대 교수는 최근 자신의 컬렉션 노하우를 적은 ‘수집의 세계’(교보문고 펴냄)의 개정증보판을 출간해 “예술품을 비롯해 의미있는 것을 수집하는 일은 미래 가치에 투자하는 것인 동시에 플라톤의 말처럼 인생의 아름다움에 투자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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