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부턴가 상사가 추근대기 시작했다. 그는 유부남 이었다. 하루는 탁상시계를 선물로 받아 침실에 뒀다. 나중에 그것이 몰라카메라였던 것을 알았다. 한달반동안 내 방은 생중계되고 있었다.
# 막 잠이 드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경찰관 한명이 서 있었다. 그 경찰관은 한 남성이 인근 건물 옥상에서 우리집을 촬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남성은 몇 년전에도 같은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90페이지에 달하는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사례 보고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를 지난 15일 공개했다. 보고서는 38회에 걸친 피해자·전문가 인터뷰와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작성됐다.
HRW는 ‘디지털 성범죄’를 피해자의 동의 없이 촬영하거나 성적 촬영물을 무단으로 유포하거나 또는 조작·합성된 영상물을 이용하는 범죄로 정의했다. 범행 표적은 대부분 여성이라고 밝혔다. 또 피해자들이 가해자에 대한 민·형사상 절차를 진행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HRW는 한국에서 정부의 관련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는 이유로 ‘뿌리 깊은 성 불평등 문화’를 꼽았다. 한국은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 발표한 성별격차 지수(Global Gender Gap)에서 156개국 중 102위를 차지한 바 있다.
헤더 바 HRW 여성권리국 공동소장 대행은 “한국의 형사사법제도 관계자들이 대부분이 남자로 디지털 성범죄가 매우 심각한 범죄라는 사실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 보인다”며 “피해자들은 사법제도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평생동안 이 범죄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HRW는 그 근거로 지난 2019년 살인사건과 강도사건의 검찰 불기소율이 각각 27.7%, 19%로 나타났지만 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경우 43.5%에 달한다고 했다. 또 지난해 불법 촬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의 절반 이상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했다.
단체는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등 민사상 구제도 받기 쉽지 않다고 주장했다. 형사소송이 마무리 될 때까지 민사소송을 미뤄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피해자들이 긴 소송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가장 필요한 시기에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HRW는 “한국 정부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며 여성혐오는 결코 수용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았다”고 후속 조치를 촉구했다.
/박동휘 기자 slypdh@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