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가 ‘붓으로’ 도자기를 빚었다. 캔버스 위에 둥실 놓인 그 항아리는 차고 기운 달 같은 비스듬한 균형감, 숨 쉬던 흙의 가느다란 빙열, 운명처럼 튀어 오른 불길의 자국, 쓸모있게 살아온 시간의 손때마저 간직하고 있다. 보던 이가 묻는다. “이 달항아리의 진짜는 어디 있나요?” 작가가 답한다. “당신 눈 앞에 있는 이것이 원본이고, 실재입니다.”
극사실주의 화법의 작가 고영훈(69)이 2020년작 ‘만월’을 가리키며 “먼 옛날 도공이 자신만의 도자기를 빚었듯, 지금 나도 나만의 도자기를 붓으로 빚어낸다”고 말했다. 7년 만에 열리는 고영훈의 개인전 ‘관조(觀照·Contemplation)’가 한창인 서울 용산구 한남동 가나아트 나인원에서다. 50년 가까이 정교한 필치로 돌·꽃·그릇·얼굴 등을 그려온 그가 사진의 시대에 극사실 화법이 갖는 의미를 “환영과 재현이 아닌 원본의 실재(實在)”로 증명한 자리다.
일찍이 고영훈은 그림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 1974년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인 덕수궁미술관에서 ‘앙데팡당(Independant)’전이 열렸다. 1884년 프랑스에서 기존 아카데미즘에 저항한 ‘앙데팡당’이 파란을 일으켰듯, 당시 젊은 대학교수인 윤명로·박서보를 비롯해 한국에서는 무명 같았던 이우환 등이 참여한 한국의 ‘앙데팡당’도 화제였다. 막내 격으로 참여해 전시장 입구 자리를 받은 고영훈은 벽 전체와 맞먹는 400호 크기의 캔버스를 손수 짜서 크게 확대한 돌을 그렸다. 작품명은 ‘이것은 돌입니다(This is a stone)’. 관람객은 예상치 못한 큰 돌에 한 번 놀라고, 만져질 듯 생생하게 돌 표면을 묘사한 필력에 한번 더 놀랐다. 르네 마그리트(1898~1967)가 담배 파이프를 그린 1929년작 ‘이미지의 배반’의 아래쪽에 적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를 정면으로 반박한 이 작품은 회화의 종말이 예고된 시대에 새로운 도전으로 주목받았다. 아직 한국관이 생기지 않았던 1986년 제42회 베니스비엔날레에 하동철(1942~2006)과 함께 한국 작가로 처음 참가한 것도 당연했다.
“처음 돌을 그릴 때, 돌 그 자체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마그리트는 그림 속 파이프가 이미지일 뿐 실제가 아니라는 물질주의적 사고였다면, 나는 그림으로 구현된 환영(illusion)의 맥락으로 봤을 때 현실의 돌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했지요. 돌의 존재 그 자체를, 돌의 진심과 돌의 진정성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서양의 초현실주의와는 사뭇 다른 동양적인 정신성 구현과 인식론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자연 그 자체이자 이상향인 돌을 문명이고 현실인 책 위에 올려 그렸다. 그릇과 도자기를 그린 것은 2002년부터다. “대상물에 대한 존경심이 작품의 출발점”인 것이 돌에서 항아리로 옮겨갔다. 그간 인식의 장(場)으로 등장했던 배경의 책장이 사라졌다 싶지만 “이성의 상징인 책을 통해 그 한계 내에서 표현되던 것이 기(氣)와 에너지로 채워진 공간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작가가 설명한다.
도자기 표면은 보고 그린 듯 생생하지만 윤곽선은 아련하고, 때로는 이중·삼중으로 그려져 신비롭기도 하다. 작가는 “가운데 또렷한 부분이 자신의 개별성과 현재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면 가장자리의 흐릿함은 보편성이며 과거와 미래의 존재를 투영한 것”이라며 “현대물리학에서 중첩의 개념으로 다중 존재를 얘기하듯 사라진 과거, 오지 않은 미래가 안보이고 숨어있을 뿐 없는 것은 아니기에 화폭에 공존한다”고 말했다.
“작업이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는 이따금 도자기 표면을 들여다보곤 했지만, 신작 대부분은 그간 봤던 달항아리의 자세·볼륨·색감·표정·질감을 기억 속에서 꺼내 실체는 없지만 감각을 떠올려 그렸습니다. 현실적이고 생생한 모습을 그려내면서 막연함은 추상적으로 처리하기도 했죠. 극사실기법을 통해 도달하려는 궁극은 추상성입니다.”
시각 이미지의 재현을 사진기술이 도맡아버린 시대에 회화의 본질을 더 깊이 파고들면서 작가는‘ 예술은 결코 기술이 아닌 철학’임을 웅변하고 있다.
“조선시대 윤두서(1668~1715) 초상의 맥을 잇고 싶습니다.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사실을 추구하는 ‘방법’이 중요합니다. 구상을 통해 추상에 닿으려는 이상을 더듬으며 30년 돌을 그렸고, 20년 도자기를 그렸습니다. 나중에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그릴 것 같아요. 그 또한 도공의 마음으로.”
전시는 가나아트 나인원과 사운즈한남에서 동시에 열려 다음 달 9일까지 계속된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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