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1932~2020) 삼성 회장의 타계 이후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겸 리움 운영위원장 등 유족의 상속세 자진신고 기한이 이달 말로 다가왔다. 19일 재계와 문화계에 따르면 삼성 일가는 상속 내용과 절차를 투명하게 밝히기로 입장을 정하고 이 전 회장이 작고한 지 6개월이 되는 오는 26일을 전후해 공식 입장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보 30점과 보물 82점을 포함한 고미술과 국내외 근현대 미술품 1만 3,000여 점, 민간 감정기관 3곳의 시가 감정 총액이 2조5,000억~3조 원으로 파악되는 ‘이건희 컬렉션’의 향방도 이 때 확정될 전망이다. 삼성가 유족 및 관계자들은 함구하고 있지만 핵심은 이 전 회장이 수집해 온 문화유산에 대한 공익적 사회환원이다.
역사와 지역안배 고려한 통큰 기부
‘이건희 컬렉션’에는 ‘나무와 두 여인’ 등 국민화가 박수근의 주요작만 80점 이상이 포함돼 있다. 소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 이중섭의 ‘황소’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국현)에는 없는 박수근·이중섭의 대표 유화들이다. 김환기 추상미술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전면점화도 국현 소장품 목록에 없지만, 이건희 컬렉션은 일찌감치 1970년대에 그려진 푸른색 점화를 확보했다. 미술사적 의미가 큰 이들 작품을 기증할 경우 국립미술관 소장목록의 ‘이빨 빠진’ 자리를 메워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삼성가 측은 국립미술관 뿐만 아니라 전남도립미술관에 이 지역 출신의 오지호,김환기, 천경자부터 의재 허백련 등의 작품을 기증하기 위해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근대미술의 성지(聖地)이자 호암 이병철 회장의 ‘삼성상회’ 창업지이기도 한 대구미술관에는 현지 출신의 이인성, 이쾌대 등의 대표작을 기증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기증에 있어 지역 안배, 역사성까지 고려해 국민들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은 20만건(40만여점)의 소장품을 확보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역사적 빈 칸’을 채워주기 충분하다. 특히 보물 제926호 ‘수월관음보살도’를 비롯해 세계적으로도 희소한 고려불화는 국립박물관이 기증받기 원할 만한 유물 중 하나다. 다만 박물관 측은 “공식적으로 접촉한 바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는 상속세 대상에서 제외되는 순수 기증인 만큼, 자칫 ‘재벌의 팔 비틀기’를 통해 기증 받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정부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족이 사회 환원을 목표로 이건희 컬렉션의 활용방안을 결정하는데 있어 실질적 역할은 삼남매 중 막내인 이서현 이사장이 도맡았다. 고령의 모친, 경영자인 오빠와 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 이사장이 가족을 대표해 리움의 운영과 함께 예술후원을 통한 사회공헌을 맡았기 때문이다.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한 이 이사장은 3대에 걸친 삼성가 이(李)씨 중 국립미술관·박물관 후원회원으로 이름을 올린 첫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지난 2월 국립현대미술관 후원회(MDC)에 가입한 이 이사장은 지난달 초 20명 안팎 후원회원의 공식행사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시투어에도 참여했다. 당시 인사를 나눈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과 지난달 중순께 서울관에서 독대하면서 가족을 대표한 미술관 후원인으로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면밀히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 모두의 미술관 되는 리움
사회환원으로 가닥을 잡은 유족은 이건희 컬렉션의 상당수를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리움과 호암미술관 등으로도 출연할 전망이다. 공익재단으로의 출연(기증)은 사유 미술품을 공익화를 의미한다. 리움을 삼성의 또 다른 ‘자기주머니’로 본다면 오해다. 공익재단으로 귀속된 미술품은 매매가 불가능하고, 작품을 팔아 현금화 할 수 없다. 국내법에서는 공익 법인이 해산할 경우 모든 자산을 국고로 귀속한다. 흔히 리움을 삼성 소유로 생각하지만 이미 리움은 ‘개인의 손’을 떠난 공익 기관이라는 의미다.
공익법인에 출연하는 재산 가액은 상속세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언뜻 미술품으로 ‘절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유족은 1조원 가까운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기증을 통한 세금 경감보다 포기하는 현금이 더 크기 때문이다. 3조원으로 평가된 미술품을 해외 경매를 통해 매각할 경우 상속세 최대치인 50% 세율이 적용된 1조 5,000억원만 납세하면 매각제반비용을 빼도 1조원을 현금화 할 수 있다. 유족은 상속세 6년 분할납부 제도인 연부연납을 택해도 연간 2조원을 세금으로 내야하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은 이를 위해 신용대출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컬렉션을 품을 경우 리움은 단숨에 세계 10대 사립미술관으로 부상할 수 있다.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은 “이건희 회장의 삼성이 ‘기업보국’의 산업화를 이끌고 컬렉션을 통해 이번에는 ‘문화보국’을 준비하는 계기를 만든 셈”이라며 “기증받게 될 작품들을 잘 연구·전시해서 국민 모두의 것으로 환원해 내는 정부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국가의 재벌 길들이기로 왜곡되거나 ‘사면론’ 등 정치적으로 연결되면 본래 의도가 훼손될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면서 “국내 컬렉터층의 세대교체 시기인 지금 ‘이건희 컬렉션’이 향방이 향후 다른 컬렉터들의 기증 판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공익적 자본주의 실천, 착한부자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할 향후 물납제와 문화기증제도(CGS) 도입 등의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조상인 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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