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둔 2016년 9월,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TV 토론에 나섰다. 시종일관 우세했던 클린턴이 회심의 일격으로 트럼프의 세금 포탈 문제를 거론했다. 그런데 당황할 줄 알았던 트럼프의 반응은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똑똑한 거요.” 이는 조세 정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발언이었지만, 미국인 중 상당수는 이를 ‘똑똑한 절세’로 받아들였다. 2개월 뒤, 트럼프는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트럼프의 ‘뻔뻔한’ 발언과 이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UC버클리대 경제학과의 이매누얼 사에즈 교수와 게이브리얼 저크먼 조교수는 “미국 조세 체계가 실패한 증거”라고 개탄한다. 이들은 트럼프 정권의 부자 감세에 이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까지 창궐하면서 미국의 조세 불평등이 극도로 심각해졌다고 지적한다. 부유한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의 세금 부담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본 이들은 미국 경제와 조세 역사, 역대 정치인들의 입법 사례까지 촘촘하게 분석해 ‘그들은 왜 나보다 덜 내는가(The triumph of injustice)’라는 책을 펴냈다.
책에 따르면 부자들의 세금 회피 방식은 다양하다. 트럼프는 막대한 유산에 대한 상속세를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신이 내야 할 연방소득세 액수와 항목을 줄였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은 자신의 회사인 버크셔해서웨이의 주식을 이용했다. 버크셔해서웨이는 배당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투자한 회사에도 배당을 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 결과 버핏의 부는 막대한 수준으로 증가해도 개인소득세 부담은 늘지 않았다.
페이스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18년 페이스북이 200억 달러의 이익을 내면서 회사의 지분 20%를 보유한 마크 저커버그 창업자의 부도 40억 달러 가량 늘었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배당을 하지 않는 탓에 저커버그는 늘어난 부에 대해 한 푼도 소득세를 내지 않았다. 페이스북이 법인세를 내지 않았냐는 반문이 있겠지만, 서류상 페이스북의 이익은 미국이 아니라 케이먼제도에서 발생한다. 케이먼제도의 법인세율은 0%다.
저자들에 따르면 미국의 조세 체계는 애초 부유할수록 세금을 더 내는 누진세 개념으로 설계됐으나 1980년대 이후 역진세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한때 미국의 최고 구간 소득세율은 90%에 달했고, 법인이 창출하는 이익의 50%가 과세 대상이었다. 하지만 1986년 레이건 정부의 세금 개혁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리는 400명에게 적용되는 소득세율이 23%에 그치는 반면, 하위 50%의 노동 계급에 25%의 세율이 적용되는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억만장자들이 철강 노동자나 교사, 퇴직자보다 낮을 세율을 적용받는 나라가 돼 버린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들의 ‘유리 지갑’은 일말의 숨김도 없이 소득세와 소비세 부과 대상이 되지만 부자들은 큰 세금 부담 없이 자본 소득을 계속 올리고 있다.
국경을 넘어 탈세에 나서는 기업은 또 어떤가. 조세회피처 파나마에는 모색 폰세카라는 법률 회사가 있다. 기업들의 세금 회피를 위해 유령 회사를 세우는 일을 하는데 2000년대 들어 매년 1만 개 안팎의 유령 회사를 세우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 탓에 조세 정의 실천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해결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미국을 비롯해 경제 규모가 큰 나라 몇몇이 뜻을 모아 세율 인하 경쟁을 중단하기만 해도 다국적 기업의 세금 떼먹는 행위가 유의미한 수준으로 바로 잡힐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같은 국제 협력은 미국에서 바이든 정부가 출범한 이후 가시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저자들은 또 억만장자 대상의 부유세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온건한 수준의 부유세 만으로도 매년 미국 경제 규모의 1%에 달하는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고 추산한다.
저자들은 조세 불평등의 심화가 결국 사회 전체의 번영을 해친다면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발언을 언급한다. 1930년대 조세 회피와 탈세를 통제하려 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올리버 웬델 홈스 판사의 말을 인용해 “세금은 우리가 문명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라고 강조했다. 부의 양극화가 심화하는 오늘날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1만9,800원.
/정영현 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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