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모더나·화이자·아스트라제네카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백신과 제조사의 이름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국내에서도 곧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이뤄진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된 백신이 출시될 것이라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주된 이유로 전문가들은 바이러스 벡터 플랫폼 기술이 미비하다는 점을 꼽는다. 수학에서 벡터는 크기와 방향이 있는 양을 의미하지만 의생명 분야에서는 병원체나 약물을 전달하는 매개체를 뜻한다. 말라리아를 예로 들면 병원체인 단세포 원생동물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모기가 바로 벡터다. 유전자조작을 위해 세포 안에 특정 유전자를 전달할 때 바이러스를 사용하면 바이러스가 벡터인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 전달 기술을 벡터 플랫폼 기술이라 부른다.
선진국들은 에볼라·사스·메르스 등 신종 감염병과 관련해 바이러스와 백신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또 다양한 암세포 유전자 정보를 활용해 암 치료를 위한 바이러스 벡터 플랫폼 기술도 개발해왔다. 그런 과정에서 암 백신까지 개발하고 있다. 백신 기술에는 나노, 분자 이미징, 저온 기술, 물리수학적 모델링 등 다양한 기초과학의 방법론이 활용된다. 이 때문에 백신 개발은 기초과학이 튼튼한 선진국의 전유물이 됐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예산의 50% 이상을 기초연구에 투자하고 있다. 기초연구란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표 없이 단지 자연을 더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과 호기심에 의해 추진되는 연구를 말한다. “왜 기초과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변은 “자연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국민 보건을 위한 예산의 절반 이상을 왜 특정 질병이나 문제 해결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기초연구에 투입하고 있을까. 이를 통해 바이러스 벡터 플랫폼과 같이 다양한 기술들이 개발되고 이런 기술은 필요할 때 빛을 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눈앞의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기업은 기초연구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따라서 각국은 정부투자를 통해 기초과학을 지원한다. 그 결과는 논문 등의 형태로 공개되고 공개된 지식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논문으로 공개된 연구 결과와 지식을 바로 활용하기는 쉽지 않다. 논문에 채 담겨 있지 않은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암묵지라 불리는 이러한 노하우는 실패와 경험의 축적과 함께 성장하며 그러한 성장을 통해 문제 해결의 단서까지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생명과학 분야는 다른 기초과학 분야에 비해 성과가 곧바로 사업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정부는 2021년 하반기에 대전 소재 기초과학연구원(IBS) 내에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를 설립할 예정이다. 그렇지만 이 연구소가 당장 백신 기술을 개발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장기적인 기초연구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국내 과학기술 연구개발 사업 중에는 모양은 그럴듯하나 실제 투자되는 예산과 인력의 부족으로 내실이 없는 경우도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의 1년 예산은 우리 돈으로 대략 46조 원 규모다. 올해 우리나라 국가 연구개발 예산 총액은 27조 원 정도로 미국 한 기관 예산의 절반 수준이다. 세계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실패와 경험이 오랜 기간 축적돼야 한다. 바이러스연구소를 설립했다고 해서 바로 성과를 기대하는 조급함보다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아직 진행형인 코로나19의 종착역이 어디가 될지는 미지수다. 국제 교류는 큰 타격을 입었고 경제는 곤두박질쳤으며 부의 불균형은 더욱 심화됐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기초연구가 튼튼한 국가가 살아남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우리는 기초를 튼튼히 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인류를 위한 도약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박현욱 기자 hw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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