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같이 일하고 쥐같이 먹으랬다’는 우리의 옛 속담은 소의 우직함을 뜻한다. 절묘하게도 페스트(흑사병)의 숙주였던 쥐의 해가 가고 백신의 어원이 된 소의 해 ‘신축년(辛丑年)’이 밝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시대를 관통하는 지금, 치유와 평화·풍요를 상징하는 소의 해가 각별한 의미로 여겨진다.
듬직하고 우직한 富의 상징
십이지신의 두 번째 동물인 소는 오전 1~3시의 축시(丑時), 북북동 방향을 가리킨다. 소는 고집이 세지만 듬직한 동물이라 근면·여유·자기희생을 상징한다. 소의 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고 한 ‘우보천리(牛步千里)’는 소 특유의 성실함과 우직함을 뜻한다. 풍수지리에서도 소가 편히 누운 모양의 와우형(臥牛形)과 소의 배 속 모양의 우복형(牛腹形)을 복이 깃든 명당이라 여겼다. 살아서는 농업의 노동력과 일상의 운송 수단이었으며 고기와 우유는 식재료로, 뿔과 가죽은 공예 재료로 쓰였으니 죽어서도 버릴 것이 없었다. 식구라는 의미로 ‘생구’라 불렀으니 소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날 소의 대부분은 고기 생산을 위한 비육소지만 우리 전통에서 소는 농경의 필수 요소였다. 소를 농업에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소를 조정할 수 있는 ‘코뚜레’가 있기에 가능했다. 황해도 안악 고분 벽화(357년), 평남 강서 약수리(408년), 평남 남포 덕흥리 벽화(5세기) 등에는 코뚜레를 건 소 그림이 등장한다. 이미 4세기부터 우리 농경문화에서 소를 활용한 흔적이다. 고구려 유리왕, 신라 지증왕 때 소를 이용한 쟁기 사용의 흔적도 전한다.
무엇보다 소는 오곡·농업의 신이던 ‘신농(神農)’이다.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신농은 소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가졌다.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이 임금의 덕과 능력을 뜻했으니, 고려 왕은 소 80마리를 2마리씩 쟁기에 걸어 직접 밭갈이 의식을 했다는 내용이 ‘고려사’에 전한다. 조선의 임금은 동대문구 제기동에 지금도 존재하는 선농단(사적 제436호)에서 신농에게 제사를 지냈고 역시나 직접 쟁기를 잡아 농사의 중함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풍년 기원 의식을 진행했다. 이때 선농단에서 끓여 먹은 국이 ‘선농탕’, 오늘날까지 즐겨 먹는 설렁탕이다. 옛말에 ‘정월 초하루 새벽에 소가 울면 그해는 풍년’이라고 했다. 정월 대보름에 찰밥·오곡밥·나물을 키에 얹어 소에게 내밀었을 때 소가 밥부터 먹으면 풍년, 나물 먼저 먹으면 흉년이라는 풍년점도 성행했다. 양기 충만한 5월 단오에 코뚜레를 걸면 송아지가 건강하다는 민간신앙도 있다.
소 힘이 사람의 2~4배라 소를 하루 빌려다 쓰면 사람이 이틀 정도 일을 해 갚는 ‘소 품앗이’도 우리의 전통이다. 소 목에 거는 ‘워낭’은 도난 방지 목적도 있으나 겁 많은 소가 헛소리에 놀라지 않게 종소리를 내는 것이기도 했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쇳소리 싫어하니 보호 기능도 품고 있다. 결사 항쟁을 맹세할 때는 소의 피를 함께 마셔 ‘의리’를 다짐했다. 소가 부(富)를 상징하는 것은 동서가 마찬가지라 월가(街)의 상징으로도 소 조형물이 놓여 있다. 상아탑 말고도 대학을 가리키는 표현이 ‘우골탑’이다. 소를 판 돈으로 대학 등록금을 충당했기에 소를 팔아 세운 대학 건물을 의미하는 비속어다. 소가 목돈 마련의 요긴한 수단이었다는 뜻이다.
인류 치유한 백신의 기원
호환·마마·천연두라고도 불린 두창은 기원전부터 인류를 괴롭혀온 가장 오래된 질병 중 하나다. 1950년만 해도 매년 5,000만 명이 두창으로 죽어 나갔다. 1796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우두에 걸린 소젖을 짠 소녀들이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는 경험적 가설에 착안해 감염된 소의 농을 따서 사람에게 접종했다. 살짝 우두를 앓게 하니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오늘날 백신의 기원이 됐다. 제너는 이 치료법을 라틴어로 소를 뜻하는 ‘바차(vacca)’라 불렀고 훗날 파스퇴르가 백신(vaccine)으로 명명했다. 이로써 소는 치유의 의미를 얻게 됐다.
사람이 걸리면 두창 바이러스지만 소가 감염되면 ‘우역’이었다. 기원전 8,000년께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 소의 가축화가 시작됐고 서로 병도 공유했던 것. ‘소들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우역을 짐작하게 하는 고대 기록이 상당수 전하지만 정확히 언제 발병이 시작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7세기 수의사가 없던 시절 교황의 전담 의사였던 조반니 란치시가 우역을 진단했는데 전염병에 걸린 교황령의 소들을 전부 죽이고, 의심되는 소들이 영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하고, 소독을 철저히 하자고 제안한 것이 지금도 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발생 시 사용되는 ‘살처분’ 방식이다. 소와 공존하며 발전한 인류의 역사인 셈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그려진 그림 속 소
인류 최초의 예술 작품으로 추정되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주인공은 붉은색에 살집 좋은 소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프랑스 라스코 벽화에도 사슴·돼지·곰과 함께 들소가 등장한다. 자세히 관찰해 멋지게 그린 것으로 미루어 사냥에 대한 갈망, 소에 대한 동경 수준의 애정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 김식(1579~1662년)의 소 그림은 음영 처리한 소의 몸과 순한 눈매, 평화로운 그림 분위기로 소의 성정을 전한다. 근현대미술 최고의 소 그림으로 꼽히는 것은 이중섭(1916~1956년)의 ‘소’다. 이중섭은 묵직하면서도 힘찬 걸음 내딛는 소 이외에도 싸우는 소, 피 흘리는 소 등을 그려 전쟁의 암울함 속에 우리 민족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과 개인사적 시련을 우리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소의 모습에 함축했다.
정겹고도 독창적인 미감의 화가 장욱진(1917~1990년)이 까치 못지않게 마음 담아 그린 존재도 소였다. 경기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는 벽화로 ‘동물가족’이 전시 중인데 소가 주인공이다. 소와 닭·돼지·개의 식구들이 한 가족처럼 화목하게 그려진 작품인데 제일 위에 가장 크게 그린 소가 이들 모두를 품고 있다. 벽화 위에는 쇠코뚜레와 워낭이 걸려 있다.
수묵화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고암 이응노(1904~1989년)도 소 그림을 제법 남겼으며 한국적 정감을 토속적 화풍으로 구현한 최영림(1916~1985년)도 소를 즐겨 그렸다. 그에게 소는 고향의 정서를 함축한 ‘비빌 언덕’이었으며 이상향 무릉도원에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였다. 가족애와 이를 확장한 인간애로 유명한 원로화가 황영성(80)은 향수 어린 농가의 정겨움을 표현할 때 꼭 소를 등장시켰다. 사람보다 소를 더 크게 그려 크고 듬직한 소의 존재감을 강조했다. 동양화를 전공해 서양화 재료로 작업하는 사석원(61)의 소 그림은 기운생동이 탁월해 그림만으로도 힘찬 새해를 열기 충분하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우리 생활과 문화 예술 속의 소를 주제로 한 특별전 ‘우리 곁에 있소’를 개막해 오는 3월 1일까지 연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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