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직접 하사한 ‘훈민정음’을 팔고자 내놓은 사람이 경북 안동에 있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수년간 수소문해 찾아가셨다고 해요. 파는 쪽에서 1,000원을 달라고 했으나 간송은 ‘제값을 못 쳐주는 것도 안 되는 일’이라며 1만원이나 더 얹어 1만1,000원의 거금으로 구입하셨습니다.”
일제의 문화침탈이 극성이던 때 전 재산을 털어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해 ‘문화재 독립운동가’로 칭송받는 간송 전형필(1906~1962)이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그의 아들 전성우(1934~2018)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기억이다. 전 이사장은 지난 2014년 3월 서울경제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며 “나는 아버지가 지키고 모은 것들을 보존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창고지기’”라고 덧붙였다.
국보 1호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문화재제자리찾기 등 문화재 관련 시민단체가 ‘훈민정음 국보 1호’ 지정운동을 지정했을 정도로 훈민정음의 가치는 크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일명 ‘간송본’ 외에 새롭게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인 ‘상주본’을 두고 “1조 원의 가치”라며 “1,000억원을 주면 상주본이 어디있는지 알려주겠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것만 보더라도 국보 70호 훈민정음의 재화적 가치는 말 그대로 ‘무가지보(無價之寶·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보물)’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값어치가 1,000억원이든 1조원이든 훈민정음에 대한 상속세는 0원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및 시·도 지정문화재와 이를 소장하고 있는 토지는 상속세가 비과세된다’는 문화재보호법 상속세 및 증여세 제12조에 따라 비과세 되기 때문이다.
■간송 소장 ‘보물’ 불상 2점이 경매에 나왔다
그런 간송 집안에서 상속세 등을 포함한 재정난을 이유로 보물 제 284호로 지정된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과 보물 285호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2점을 경매에 내놓았다. 지난 1963년에 나란히 보물로 지정된 이들 불상이 오는 27일 강남구 신사동 사옥에서 열리는 케이옥션 경매에 출품됐다. 간송이 수집한 유물이 과거 경매시장에 나온 적 있다는 것은 문화재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이번처럼 소장처가 공개될 수밖에 없는 국가지정문화재가 떠들썩하게 경매에 오르기는 처음이다. 이들 불상의 소유자는 간송의 유족, 관리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으로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공개돼 있다.
“완전한 아름다움 같으면서도 어디엔가 좀 더 손질이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겨 놓고 있고, 또 막상 손을 대려면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만큼 삼국의 불상은 신기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높이 37.6㎝로 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284호 금동여래입상은 출토지가 정확하지 않은 유물이나 같은 시기의 금동불상으로는 드물게 큰 키다. 6~7세기 경의 유물로 높이 18.8㎝의 자그마한 보물 285호 금동보살입상은 같은 시기 것으로는 유일하게 알려진 신라 지역 출토 불상이며, 백제 및 일본 초기 불상과의 교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를 사고 파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케이옥션과 서울옥션 등의 주요 경매에서는 이따금씩 국가지정문화재와 지정문화재 등이 거래된다. 지난 2012년에는 보물 제585호인 ‘퇴우이선생진적첩’이 당시 국내 고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34억원에 낙찰됐고 삼성문화재단이 새 소유주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케이옥션 측은 ‘간송 집안이 유물을 내놨다’는 세간의 수군거림을 의식해 불상 2점의 출품 사실에 대한 보안을 유지해 왔다. 이에 도록 및 온라인 전시에서도 이들 2점의 불상은 수록하지 않았고, 100부 미만의 한정판 도록을 통해 국·공립 박물관과 주요 수집가들에게만 출품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지난 21일부터 케이옥션 전시장에서 유물을 공개하고 있으며 경매 시작가는 27일 당일 결정될 예정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비과세지만 상속세 낼 몫이 더 많아
간송의 유족이 주축으로 설립한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지난 21일 홈페이지에 게시한 입장문을 통해 “2013년 공익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시대의 변화에 말맞춰 나가기 위해 재단을 설립한 이후, 대중적인 전시와 문화 사업들을 병행하면서 이전보다 많은 비용이 발생하여 재정적인 압박이 커진 것도 사실”이라며 “이런 가운데 전성우 전 이사장의 소천 이후, 추가로 적지않은 비용이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국세청과 문화재청, 서울시 등 여러 기관을 비롯해 뜻있는 많은 분들께서 간송 선생의 유지와 간송미술관의 활동과 지향에 공감해 많은 배려와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상속세 문제를 인정한 셈이다. 문제는, 국가지정문화재에 대해서는 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그 외 유물과 국가등록문화재에 대해서는 상속세를 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간송 전형필이 1938년에 지은 성북동 소재 ‘서울 보화각’은 지난해 말 국가등록문화재 제 768호가 됐다. ‘지정’문화재가 아닌 ‘동록’문화재인 만큼 토지와 건축물에 대한 상속세가 부과됐다. 지난해 1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 전시 당시 간송의 장손인 전인건 간송미술관 관장은 “1938년에 지어 대규모 관람에는 불편함이 있던 간송미술관(보화각) 건물은 1950년대 당시 형태로 복원해 이르면 2019년 가을이나 늦어도 2020년 봄쯤 다시 성북동에서 관람객을 맞이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보화각은 일제강점기 때 문화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라는 점, 한국인 1세대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물이라는 점 등 역사적 의미가 크다. 274㎡ 규모에 연면적 460㎡의 2층 건축물로, 노후화와 항온·항습 등의 어려움으로 전시 관람은 물론 유물 보존에도 어려움이 컸던 게 사실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보화각 복원과 함께 그 정문 앞에 4,000여 점의 소장 유물 관리를 위한 현대식 수장고를 신축하기로 밝혔고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약 44억원이 투입되기로 했다.
계획대로였다면 올 봄 재개관했어야 할 보화각이 아직도 휴관 중이다. 수장고 신축과 내부 복원공사를 위한 자금난이 지연 이유라는 얘기가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국보 제135호 ‘신윤복 필 풍속도화첩’ 등 지정문화재 48점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4,000여 유물에 대한 상속세 및 보화각과 관련 부지에 대한 상속세 등 해결해야 할 몫이 태산이다.
■‘간송의 뜻’에서 해법 찾아야
문화적·사료적 가치가 높고 국가지정문화재이기는 하나 간송이 사재를 털어 확보한 이들 유물은 사유재산인 만큼 사고 파는 것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다. 다만 간송 선생이 일제의 문화침탈에 맞서 현해탄을 건너고, 불쏘시개가 될 뻔 한 문화재를 찾아다니고, 기와집 몇 채 값을 줘가며 모은 그 뜻을 생각한다면 방법 면에서 좀 더 신중할 필요는 있다. 특히 경매를 통해 유물을 내 놓아 해외 입찰자가 구입한다면, 문화재의 국외 반출 조건이 까다롭기는 하나 복잡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왕관을 쓴 자가 그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듯, 간송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문화재를 물려 받으며 내는 상속세는 불가피하다. 이후 소장품의 연구·조사·관리·전시를 위한 유지 비용도 오롯이 유족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떠안게 됐다.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물 중 일부를 상속세 등 세금 대신 ‘물납’ 형태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기부하는 방법이 있다. 국립박물관의 관리 여건이 더 좋겠지만 유물이 흩어지는 것을 우려한다면 원래 소장처였던 간송미술관이 위탁관리하는 것 또한 가능할 수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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