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일은 현행 형사·사법체계에 실망한 국민들의 신뢰를 되찾기 위한 첫 단추입니다.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을 통한 상호견제 속에서 경찰은 수사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강화하고 검찰은 기소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인다면 국민들도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검찰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뜨거운 만큼 올해 안에 국회에서 반드시 입법으로 완성해주길 바랍니다.”
오는 21일 ‘제74주년 경찰의날’을 일주일 여 앞둔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만난 민갑룡(54·사진) 경찰청장은 “지난 70여년간 국민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경찰의 외형도 함께 커졌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형사·사법 시스템은 현실을 오롯이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검찰의 수사지휘에서 벗어나 경찰이 독자적인 수사권을 갖는 검경 수사권 조정은 경찰의 오랜 숙원이다.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와 맞물려 현 정부의 중점과제로 떠올랐지만 입법을 통해 마침표를 찍어야 할 국회의 처리 전망은 아직 불투명하다. 이 밖에도 자치경찰제 도입을 비롯해 ‘버닝썬 사건’에서 드러난 경찰 내부 비리를 뿌리 뽑는 고강도 개혁과 국가수사본부 신설 등 그의 책상 위에는 그동안 경찰이 풀지 못한 숱한 난제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민 청장은 “갈 길이 아직 멀지만 국민들과 약속한 경찰개혁의 과제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풀어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대담=최형욱 사회부장 choihuk@sedaily.com
2019년 경찰의 최대 화두는 단연 검경 수사권 조정이다. 올 4월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가 선거제 개편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과 함께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면서 국회로 공이 넘어간 상태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 실현되면 경찰은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사하거나 수사를 종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경찰이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독립적 수사기구로 거듭나게 되는 셈이다. 민 청장은 “해외 선진국들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따라 수사와 기소권을 분리해 경찰과 검찰이 서로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며 “경찰이 온전한 수사권을 갖게 되면 마지막 수사 결과까지 책임져야 하는 만큼 그동안 반복돼온 부실 초동수사 논란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찰청이 주요20개국(G20) 수사구조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없는 나라’는 68.4%, ‘경찰이 영장청구권을 갖는 나라’는 73.7%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검사가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와 직접수사를 하는 대신 경찰에 수사종결권과 영장청구권이 없는 나라는 이탈리아와 멕시코 등 단 두 곳에 불과했다. 자칫 경찰 권한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촘촘한 견제장치를 통해 권한 남용 가능성을 통제할 수 있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정작 법안을 처리해야 할 국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검경 수사권 조정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패스트트랙 상정 자체가 불법”이라며 벼르고 있어 법안 처리 전망이 불투명하다. 이에 대해 민 청장은 “검경 수사권 조정은 여야 간 이견이 크지 않은데다 검찰개혁을 외치는 국민적 요구가 커진 만큼 연내 입법 처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국회 논의과정에도 적극 참여해 제 목소리를 내겠다”고 강조했다.
경찰이 검찰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 수사권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그렇지만 최근 강남 클럽 버닝썬 사건에서 드러난 일부 경찰의 유착 비리나 ‘고유정 전 남편 살해사건’에서 불거진 부실 초동수사 논란 등을 통해 경찰에 실망감을 느낀 국민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러한 시선을 의식한 듯 민 청장은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동안 ‘신뢰’라는 단어를 수십 차례나 언급하며 경찰의 신뢰 회복을 강조했다. 그는 “여러 사건에서 드러난 경찰의 초기 대응 미흡으로 국민들은 경찰의 권한 남용 우려와 법 집행의 공정성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동안 묵인돼온 불투명한 절차나 관행·조직문화 등을 개선하는 한편 경찰의 현장대응 역량도 강화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버닝썬 사건 직후인 지난 7월부터 비위 발생이 잦은 경찰관서에 대한 특별인사관리구역 지정과 강남권 경찰을 감시하는 반부패 전담팀 운용, 수사·단속요원에 대한 검증 강화 등 유착비리 근절대책을 시행 중이다. 또 경찰의 수사 초기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요 사건의 경우 경찰청이나 지방청 단위에서 종합적 위기관리와 지원을 해주는 ‘위기대응체계’도 가동하고 있다. 종합대응팀은 7월 발생한 ‘서초동 철거건물 붕괴사고’를 포함한 대형 안전사고나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에서 다각적인 수사와 현장감식은 물론 피해자 보호와 법률검토까지 책임지게 된다.
일선 수사팀에 대한 부당한 외압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된다. 민 청장은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이 과연 수사의 공정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국가경찰의 수사사무를 총괄하는 ‘국가수사본부’를 신설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외압에 휘둘리지 않고 수사에 전담하는 국가수사본부 설치와 함께 개별사건에 대한 관서장의 구체적 수사지휘권을 폐지하는 방안도 추진하겠다는 게 민 청장의 구상이다. 그는 “관서장이 수사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수사경찰에 대한 인사·감찰제도를 개선하는 등 경찰 수사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높여가겠다”고 덧붙였다.
과거 정권에서 정치관여와 불법사찰로 논란이 된 ‘정보경찰’도 경찰개혁 과제 중 하나다. 다만 민 청장은 정보경찰의 필요성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섣부른 폐지보다는 문제점을 없애는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보경찰의 활동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활동규칙을 만들고 정보국 내에 각종 정보보고를 모니터링하는 준법지원계를 신설해 정보활동의 불법·일탈행위를 차단하겠다는 계획이다.
경찰은 경찰개혁의 주체인 동시에 개혁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 내부의 통제만으로는 많은 국민의 신뢰와 공감을 얻는 데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통제장치다. 민 청장은 “근대 경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로버트 필이 ‘경찰은 시민이고 시민이 곧 경찰’이라고 말했듯 경찰의 역사는 시민에게서 치안에 대한 책임을 위임받으면서 시작됐다”며 “시민들에게 위임받은 공권력을 경찰이 남용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시민통제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맞춰 경찰은 기존 법률·수사전문가들로 구성돼온 ‘수사이의 심사위원회’를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사건심사 시민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기로 했다. 경찰 수사과정을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 아닌 일반 국민들의 시각과 정서에서 바라보도록 하겠다는 의미다. 경찰은 다음달까지 대전과 강원지방경찰청의 시범운영을 거쳐 전국 지방청으로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올해 경찰이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는 자치경찰제 도입이다. 정부는 검경 수사권 조정과 연동해 자치경찰제를 2021년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자치경찰제가 시행되면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비대해진 경찰의 권한을 지역자치단체와 나누게 된다. 국가경찰은 중요·강력범죄에 집중하고 지자체가 운영하는 자치경찰은 주민생활과 밀접한 치안 서비스를 담당하는 구조다. 제도 시행을 위해서는 경찰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필수이지만 소관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에서는 아직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초 이달 말로 예정된 시범운영지역 선정작업도 사실상 무기한 연기됐다. 민 청장은 “자치경찰이 도입되면 학교폭력이나 아동학대, 자살위험 신고 등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사건 처리는 물론 피해자에 대한 복지행정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게 된다”며 “특히 신호등과 가로등, 폐쇄회로(CC)TV 설치 등 교통안전·범죄예방시설 확충에 대한 주민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 내부의 반발 여론도 변수다. 김영우 자유한국당 의원이 최근 현직 경찰관 8,62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6.8%가 자치경찰제 도입에 반대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민 청장은 “일선 경찰들이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가경찰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우와 신분에 대한 우려”라며 “신분은 국가직을 유지하되 소속만 지자체에 두거나 일정 이상 처우를 보장해주는 제도적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방안도 충분히 검토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원하지 않는 경찰관들은 절대 강제로 자치경찰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며 “내부 여론을 수렴해 국회 논의과정에 현장 의견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민 청장은 취임 이후 장기미제사건에 대한 수사 의지도 불태우고 있다. 그는 “경찰 수사의 가장 큰 목적은 실체적 진실 발견이고 처벌은 그다음 문제”라면서 “피해자의 한을 풀어주고 사회 전체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제사건으로 남겨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밝혀진 것도 DNA 대조 분석을 통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경찰의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화성사건의 용의자 이춘재가 이미 범인이 검거돼 옥살이까지 치른 8차 사건까지 자신의 소행이라고 털어놓으면서 경찰의 성과는 퇴색했다. 민 청장은 8차 사건 진범 논란과 관련해 “당시 증거물 재검증과 함께 범인으로 검거된 윤씨의 자백과정과 이춘재의 진술 등을 면밀히 조사 중”이라며 “단 한 점 의혹 없이 철저히 사실을 규명한 뒤 그 결과에 따라 피해회복 등을 포함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정원이 부족한 지방청 미제수사팀을 충원하고 우수자에게는 특진과 표창 등 포상도 하겠다”며 미제사건수사팀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도 약속했다.
경찰 핵심요직을 장악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경찰대 개혁에 대한 구상도 밝혔다. 민 청장은 경찰대 출신으로 경찰 최고 수장에 오른 두 번째 청장이다. 그는 “신입생 정원을 줄이는 대신 재직경찰관 및 일반대학생 편입학 제도 도입으로 경찰대의 문호를 개방해 경찰 리더를 양성하는 전문교육기관으로 개혁할 것”이라며 “고위직 인사에 있어서도 지역·입직·기능별 균형인사를 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정리=김현상·손구민기자 kim0123@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He is…
△1965년 전남 영암 △1988년 경찰대 행정학 △199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2008년 무안경찰서장 △2009년 경찰청 수사구조개혁팀장 △2011년 서울 송파경찰서장 △2013년 경찰청 기획조정담당관 △2014년 광주지방경찰청 제1부장 △2015년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장 △2016년 서울지방경찰청 차장 △2017년 경찰청 차장 △2018년 7월~ 제21대 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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