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연구자에겐 1억엔(약 10억8,800만원)의 임금을 지급할 수도 있다.”
지난 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진행된 일본 최대 통신회사 NTT의 첨단 연구 착수 행사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건 단연 사와다 준 사장의 발언이었다. 그는 현재 2,000만엔(약 2억 1,700만원) 정도인 연구자의 연 수입을 경우에 따라 다섯 배까지도 올릴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첨단기술 분야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처우를 파격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일본 기업이 너도나도 ‘인재 모시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뛰어난 인재라면 신입사원이라도 임원급에 해당하는 연봉을 지급하고서라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통신·전자기기 업체 NEC는 젊은 연구직 사원의 보수 결정에 사외의 평가를 반영하는 제도를 10월 도입할 예정이라고 지난 10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대졸 신입사원이라도 재학시절 유명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는 등 실적이 인정되면 1,000만엔(약 1억 882만원) 이상의 연봉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 회사에 입사한 박사학위 보유 신입사원 월급이 29만9,000엔이라는 사실에 미뤄볼 때 매우 큰 폭의 상승이다.
컴퓨터·전자기기 제조업체 후지쓰도 인재 모시기에 동참했다. 후지쓰는 캐나다에 있는 인공지능(AI) 자회사 인력을 대상으로 본사 임원급인 수천만 엔의 연봉을 지급하고 인원도 200명 정도 증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AI 인재를 내년에 현재보다 70% 많은 2,500명 규모로 늘릴 계획이다.
일본 기업들이 이처럼 신입직원에게 억대 연봉을 제시하면서 공격적인 인재 유치에 나선 건 오랫동안 일본 노동 시장에 자리 잡은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에 대한 회의론이 퍼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기업은 입사한 순서대로 직급과 연봉이 올라가는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고수해왔다. 개인의 능력과 성과를 토대로 임금을 책정하기보다 경력이 쌓이면 능력도 그만큼 축적될 것이란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저출산·고령화에 따라 생산인구가 감소하며 일손 부족 현상이 심화됐고 자연스럽게 구직자가 우위에 있는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도 고임금을 내세우며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일본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은 평균 20만6,700엔(약 210만원)으로 최근 10년간 9,300억엔 오르는 데 그쳤다. 일손부족 현상이 심해질수록 젊은 층은 연공서열형 임금체계가 아닌 성과주의 임금 체계를 택한 외국계 기업 선호도가 높아질 수 있다.
일본의 정보기술(IT) 기업 소니가 첨단 기술 분야에 전문 능력을 갖춘 신입 직원에게 최대 20% 많은 연봉을 지급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신입사원에게 능력과 관계없이 첫해에 동일한 연봉을 적용했던 소니는 올해부터 성과와 전문성 등의 평가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하기로 했다.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IT 기업들 사이에서 치열한 인공지능(AI) 인재 경쟁이 벌어지자 기존의 연공서열형 임금 시스템으로는 젊은 인재들에게 해당 기업에서 일할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 기업들은 첨단 디지털 분야의 우수 인재에 대한 쟁탈전에서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캐나다의 AI 전문기업 ‘엘리먼트AI’에 따르면 이 분야의 세계 정상급 인력 2만2,400명 가운데 절반은 미국에 집중돼 있었다. 반면 일본이 확보한 인재는 4% 수준에 그쳐 중국(11%)보다도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파격적인 연봉으로 인재를 확보하려는 기업은 IT업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일본의 패스트리테일링은 지난달 23일 입사한 지 3년 된 젊은 직원이라도 능력이 인정되면 고연봉의 자회사 간부로 발탁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입사 후 점포와 정보기술(IT) 분야 등에서 경험을 쌓은 뒤 일본 국내외에서 경영 간부로 등용되는데, 일본 내에서 근무할 경우 연봉은 1,000만엔을 넘게 되고 유럽이나 미국에서 근무하면 2,000만~3,000만 엔(약 2~3억원)에 이르게 된다.
일본 회전초밥 전문업체 구라즈시는 지난 5월 공고한 내년 봄 신입사원 채용 요강에서 간부후보생으로 뽑힌 신입사원의 첫해 연봉으로 1,000만 엔을 제시해 화제를 모았다. 장기적으로 해외 자회사를 경영할 인력을 찾는 구라즈시는 ‘특급인재’로 뽑힌 신입사원에게 전체 직원 평균 연봉(약 450만엔)의 2배가 넘는 연봉을 지급한다. 지원 자격은 26세 이하에 토익 800점 이상으로 해외에서 영업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갖추면 된다.
물론 일본 기업의 이 같은 파격적 대우에도 불구하고 거대 글로벌 기업을 따라잡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페이스북 직원의 연봉 중앙값은 22만8,651달러(약 2억7,000만원)이며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 중에는 3,000만~4,000만 엔 이상을 받는 경우도 있다. 니혼게이자이는 “일본 기업이 젊은 인재들의 연봉을 높인다 해도 미국의 실리콘밸리 엔지니어들에는 미치지 못한다”며 “일본 기업이 연공서열형 급여체계를 고집하다 보면 인재확보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희윤기자 heeyou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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