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국 혜안리서치 대표(전 대우증권 대표)를 만난 지난 10일 통계청은 ‘3월 고용동향’을 발표했다. 취업자가 2개월 연속 20만명 이상 증가하자 정부는 “긍정적인 모멘텀”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재정을 투입해 임시로 일자리를 만들어낸 60세 이상 취업자가 대폭 늘어난 효과일 뿐 역대 최악인 고용시장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고실업·양극화의 삼중고에 직면한 정부는 재정을 풀어 경기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반복적으로 투여되는 모르핀 주사처럼 추가경정예산 편성은 연례행사가 됐다. 그럼에도 경기는 만성적인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홍 대표는 “지난 500년간 이어져온 팽창사회가 끝나고 사회 전체의 파이가 줄어드는 수축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며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한국 역시 수축사회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은 특히 저출산·고령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반복적인 정책실패로 장기 복합불황을 겪었던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며 “앞문에는 호랑이, 뒷문에는 늑대가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홍 대표는 “기존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역사적인 대전환에 각자도생의 게임이 한창인데 우리 사회 리더들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기득권 싸움만 벌이고 있다”며 “수축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좌파정책이든 우파정책이든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성장·고실업·양극화의 삼중고에 직면해 있다.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나.
△한국의 숙명이다. 한국은 경제개발을 시작한 지난 60여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국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은 마치 칭키즈칸의 군대가 유럽을 점령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오직 공격 앞으로, 성장에만 올인했다. 사회문화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한 상태로 공격만 하다가 세상이 수축사회로 변하니 동시다발적으로 갈등이 분출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저성장·고실업·양극화의 본질이다.
-수축사회에서 모든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인구 감소, 과학기술 발전, 환경 오염은 21세기 들어 전 세계를 움직이는 3대 핵심동인이자 수축사회의 특징이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등 선진국 인구는 역사상 고점을 찍었다. 중국도 10년 이내 인구가 줄어들 것이다. 모든 시스템이 인구 증가를 전제로 만들어졌는데 인구가 더 이상 늘지 않으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과학기술 발전도 너무 빠르다. 그동안 과학기술은 J커브 형태로 발전하면서 공급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세계 경제에 동참한 지 불과 15년 만에 세계는 공급과잉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인공지능(AI) 도입 이후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엄청난 양극화가 불가피해졌다. 중산층이 줄어 복지부담은 커지고 소비는 줄어든다. 여기에다 환경오염에 대응하느라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 우리는 연간 100조원 이상을 환경오염 방지와 해소에 사용하고 있다. 만일 이 자금을 복지나 성장의 재원으로 사용한다면 여전히 팽창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가지 핵심동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를 동시에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삼중고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오지 않았나.
△중요한 사실은 이 세 가지 핵심동인을 해결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단기정책으로 ‘돌려막기’에 급급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도 해결되지 못했다. 모든 산업은 공급과잉이고 고령화로 복지 수요가 급증하면서 어느 나라나 부채가 역사상 최고점에 와 있다. 이 가운데서도 한국이 심각하다. 특히 인구구조 변화는 가장 큰 요인이다. 팽창시대의 산물인 연금·의료보험·복지 등 사회안전망과 교육 시스템이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한국은 오는 2024년이면 60세가 넘는 베이비부머가 700만명을 돌파한다. 1·2차 베이비부머(1955~1974년생)를 합치면 무려 1,500만명이다. 재정적자도 본격화하고 가계부채도 감당이 쉽지 않다.
-저출산·고령화는 일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데.
△2012년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을 할 당시 ‘한국, 일본형 장기 복합불황으로 가나’라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1990년대 버블붕괴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한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일본은 금리를 내리고 경기부양책을 쓰면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는 생각에 소극적이고 단기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다. 불황이 깊어지면서 의욕을 상실하고 위기를 자신과 분리해 남의 일처럼 파악하는 ‘시장의 극장화’ 현상을 보이기까지 했다. 한국 역시 비슷하다. 일본이 자신들을 표현했듯이 ‘앞문에는 호랑이, 뒷문에는 늑대’가 있는 상황이다. 과거의 상처(성공 신화, 주력산업 쇠퇴, 경제구조, 교육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미래의 위험과 도전(국제질서의 약육강식, 인구 감소, 기술 발전)이 기다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정책집행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우선 소득주도 성장이 왜 필요한지 국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 근로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미투 운동, 김영란 법이 결합되고 여기에 소비구조 변화가 동시에 접목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사양산업인 자영업과 중소기업에만 피해가 집중되는 효과가 있다. 단계적으로 시행하면 사회가 자발적으로 적응하면서 선진형으로 사회구조가 전환될 수 있는데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성장과 미래에 대한 담론을 찾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쉽지만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다. 영국은 브렉시트, 남유럽은 포퓰리즘, 미국도 역시 양극화와 포퓰리즘 등으로 몸살을 앓으면서 눈앞의 이익만 보고 있다. 포퓰리즘의 득세는 수축사회의 대표적 징후다. 수축사회를 역전시키기 위한 구조적이고 미래형 대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대외적인 파고에 정책운용이 어려운 시기다. 재정·통화정책을 어떻게 해야 하나.
△수축사회의 영향 중 경제적으로 중요한 것이 공급과잉과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부채다. 통화정책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능력은 거의 모든 국가가 상실했다. 국가 재정이 마지막 구원투수다. 아직 한국은 세계에서 재정이 가장 건전한 국가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가계부채에다 고령화 속도도 가장 빠르다. 양극화 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는데 사회안전망은 아직도 상당히 미흡하다. 통일비용도 생각해야 하고 앞으로 돈을 쓸 곳도 많다. 지금처럼 단기 일자리를 만드는 데 돈을 써서는 안 된다.
-정부가 재정중독증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가 계속 추경을 한다는 것은 우선 예산을 잘못 편성했다는 것이다. 관성적인 예산 편성은 역대 정부도 마찬가지다. 재정은 10~20년을 내다보고 집행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기업들이 워낙 돈을 잘 벌었고 세금도 잘 걷혔지만 수축사회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현재의 재정사용 속도는 너무 빠르다. 야구에 비유하면 9회에 투입될 ‘마무리 투수’가 6회쯤 등판한 꼴이다. 마무리 투수가 난타당하면 그 팀은 패배한다. 앞으로 한국은 가장 빨리 수축사회에 진입할 것이다. 시간이 없으므로 전략적으로 재정을 사용해야 한다.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 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실용주의 노선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데올로기는 팽창사회, 특히 1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되는 사회구조는 완전히 달라졌다. 수축사회의 공포를 제대로 안다면 앞으로 이데올로기는 ‘생존’이 될 듯하다. 살아갈 수 있다면 뭐든지 해야 한다. 그게 이데올로기다. 좌파정책이든, 우파정책이든 생존과 성장에 필요하다면 핀셋으로 뽑아서 써야 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정책이 대표적이다.
-경제위기가 반복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리더십은.
△과거의 위기는 경기순환적 측면이 강했다. 수축사회의 위기는 사회 전체의 위기다. 그리고 외부 요인이라기보다는 기초환경의 대전환이고 한국의 내부적 측면도 만만치 않다. 과거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또 양극화에 기초한 사회 갈등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회 전체를 혁명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개혁할 정책과 비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리더들은 전부 과거형이다. 정치권을 보더라도 여야는 전부 과거를 놓고 싸운다. 한국 사회의 리더들은 고시·학벌·돈 등 라이선스로 보호받고 있다. 세상의 변화와 담을 쌓은 채 그들만의 리그에 머무르고 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수축사회에 맞는 지식을 쌓아야 한다. 세상 변화에 대한 호기심이 필요하다. 이해갈등의 조정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기득권과 미래의 전환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의 문제다. /김정곤 논설위원 mckid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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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증권업계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대우증권에 입사했다. 대우증권에서 재직한 30년 동안 주로 투자분석과 경제전망을 담당하는 리서치센터에 있었다. 리서치센터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특유의 혜안으로 업계 최고의 리서치센터로 이끌었다. 2014년 대우증권 공채 출신 첫 최고경영자(CEO)에 올랐고 미래에셋증권과 합병한 후로도 대표이사로 재직했다. 2016년 말 퇴사 이후에는 학업과 함께 저술활동·강의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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