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의 대법원 판결, 연이은 일본군 위안부 화해치유재단의 해산 발표로 인한 한국과 일본 간 갈등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판결에 대해 지금에 와서야 식민지 시대의 불법성을 명백히 인정한 것으로 한국에서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따라서 현재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나 고노 다로 외무상의 반발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분위기조차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대법원 판결을 ‘1965년 기본조약의 근본 전제를 바꾸는 가장 큰 사건’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국에 대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경악과 실망감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한국은 법치국가가 아니다’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한일의 감정 차이야말로 한일 대립의 근원이 되고 있으며 한일 갈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한일관계의 변화된 모습은 이번 사건의 파장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우선 한국을 대하는 일본 여론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일관계는 한국이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일본이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는 태도에 한국이 흥분하는 경향이 많았다. 한국의 격한 감정에 대해 일본은 언제나 차가운 태도로 응대해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한일의 감정이 역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일관계의 모습은 ‘격한 일본, 냉정한 한국’이 어울리게 됐다. 이제 일본이 한국의 자세와 태도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할 정도다.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 피로감’이 아베의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게 됐다. 이번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이나 재단 해산에 대해서도 일본이 도리어 한국에 대해 조약이나 합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한국 때리기’에 일본 여론이 동조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일정책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의 여론에 대한 한국의 대응이 시급한 시점이다.
둘째, 외교의 국내 정치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 이후 한국 정부는 종합적인 판단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뾰족한 묘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여론의 공세를 정부가 극복하면서 전략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지다. 또한 화해치유재단에 대한 정부의 해산 결정은 국민적인 불만을 수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한일관계의 방향성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즉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채 재단 해산만 발표를 한 것은 한국 정부가 여론에 굴복했다고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도 국내 정치에 휩쓸리면서 전략적인 판단을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베가 대법원 판결 이후 ‘징용공(徵用工)’을 ‘한반도 노동자’로 표현한 것은 사실을 무시한 ‘여론 기대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지지세력을 의식한 아베의 발언이야말로 국내 정치화된 한일관계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한일관계의 악화에 대해서는 누구도 무관심하다. 물론 한일 정부의 담당자들은 한일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동감하고 있다. 그러나 한일 정부가 적극적으로 한일관계를 개선하기에는 무력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전만 하더라도 한일관계의 갈등이 심화되면 경제인이나 언론이 한일의 우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서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할 수 있는 정치적인 환경이 만들어졌다. 한일 갈등이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우려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또한 한일관계의 악화는 대북 문제와 동북아시아 질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생각에 한일 정부는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움직이는 경제인·언론인·정치인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양국 국민들도 관광이나 음식 등에 관심은 많아도 한일관계의 갈등이 일상화돼 있는 것에 익숙해 있는 탓에 한일관계의 개선에는 관심이 없다.
변화된 한일관계 모습은 장기적으로 한일관계가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결국 변화된 한일관계 모습은 대일정책에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일정책이 이슈에 매몰되기보다는 큰 틀을 짜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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