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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59>-최영림 '소와 아이들'] 벌거벗은 채 소와 뒹구는 아이들...화폭에 담은 '삶의 원천성'

자유롭고 유려한 선·화강암같은 표면

목가적 서정주의 구상회화 세계 열어

평양 태생의 실향민으로 굴곡진 인생

중년이후엔 불교,설화 소재 그림 그려

최영림 ‘소와 아이들’ 1981년작, 캔버스에 유채와 흙, 75x170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아이들은 솔직하다. 좋으면 웃고 싫으면 찡그리는 그 감정 표현뿐만 아니다. 더우면 훌렁훌렁 옷 벗어던지고 닭 보이면 마냥 쫓아다니고 소가 보이면 냉큼 올라타 버린다. 자연에서 나고 자라 흙색으로 피부 그을린 아이들이 커다란 황소 곁에 매달려 있으니 어느 것이 땅이고, 어느 것이 아이이고 소인지 그저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봄꽃이 반가운 것은 남녀불문 인지상정이다. 분홍 꽃을 손에 든 입술 도톰한 녀석이 딸아이인가 싶어 봤더니 속옷 한 장 입지 않은 사내아이라 웃음 짓게 한다. 제일 극성인 꼬마가 소의 엉덩짝을 쥐고서는 타고 오르려 안간힘 쓰는 중이다. 꽃향기에 취한 듯 노란 눈이 빙글빙글 돌아간 황소는 사실 아이들에게 시달려 쓰러질 판이다. 두툼한 혀까지 입 밖으로 내둘렀건만 노랑나비 흰나비는 여유 만만 따뜻한 봄날을 만끽한다. 소의 옆구리와 등이 울퉁불퉁해 보이는데 살집이라기보다는 도드라진 뼈 같아 측은하기도 하다. 어쩌면 이 소는 자식들 거둬 먹이느라 제 몸 챙길 겨를 없었던 우리의 부모를 상징하는 것일지 모른다. 주렁주렁 매달린 아이들이 버거워도 힘들지 않다 말한다. 사랑이니까. 그림에는 꽁지깃 푸른 수탉과 흰 털 고운 암탉도 나란히 놓여 부모와 아이들로 이뤄진 한 가족을 상상하게 만든다. 사람과 동물과 자연이 둥글둥글 하나로 읽히는 최영림(1916~1985)의 1981년작 ‘소와 아이들’이다. 어린이날을 맞은 우리 아이들이 이 정도만 즐거워도 부러울 것 없겠다. 소박하지만 건강한 행복이 넘실대는 한 때 말이다.

최영림 ‘동심’ 1967년작, 캔버스에 유채와 흙, 72x90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화가 최영림은 1916년 평양에서 두 번째로 큰 약재상 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같은 해 같은 곳에서 난 이가 이중섭(1916~1956)이다. 당시 평양은 중국으로 통하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새로운 문물에 유독 빨랐다. 평양 출신의 화가가 많은 이유다. 심지어 최영림과 이중섭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중섭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리고 따져본다면 자유롭고 능숙한 선(線)으로 작업하는 실력에서 둘이 막상막하다. 아이들을 소재로 등장시키는 것이나 소를 그린 것도 공통점이다. 하늘을 올려다 보는 그림 속 아이의 둥그런 얼굴이 뒤집혀 있다. 이중섭도 ‘게와 아이들’ 등의 그림에서 이 같은 방식의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표현법인데, 둘 다 벽화의 영향을 받았다. 평양은 고구려 고분이 두루 퍼져 있는 지역이며 이들이 유년기를 보내던 때가 한참 발굴이 전개된 후였기에 고구려 벽화가 준 충격은 남달랐을 것이다. 이중섭은 스스로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그의 예술적 원천을 얻었노라고 공공연히 밝혔고, 최영림은 그림을 처음 가르쳐준 스승이 당시 평양박물관 학예원으로 근무하며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에 참여하던 오노 타다아키라(1903~1994)였다.

최영림 ‘여인의 일지’ 1959년작, 캔버스에 유채, 105x145cm /사진=국립현대미술관


평양 부잣집 아들이 전쟁통에 기구한 삶으로 전락한 것도 최영림과 이중섭의 같은 궤적이다. 최영림은 고등학교 재학생이던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시골의 강’을 출품해 입선하는 등 화가로서의 재능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졸업하는 그에게 그림 선생이 자신의 친구이자 당시 일본 판화계에 급부상한 작가 무나카타 시코(1903~1975)를 소개한다. 하지만 최영림은 일본 유학 2년 만에 반강제로 귀국하고 말았다. 그가 가업을 잇기를 바란 집안 어른들의 성화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함께 그림을 배웠던 최지원이라는 친구가 죽음을 맞았고 그를 추모하며 결성된 ‘주호회’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최영림은 꾸준히 전시에 함께 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한다. 최영림은 월남을 택했다. 그때만 해도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아내, 세 딸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은 상상조차 못 했다. 가족 사랑이 남달랐던 사람이라 다시 못 볼 줄 알았더라면 아마 남쪽행을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찌어찌 다른 경로로 아버지를 찾아 남으로 온 아들을 실낱같은 희망으로 붙들고 살았다. 최영림은 월남하는 도중에 금강산 주변 원산에 들러 잠시 이중섭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를 태운 배는 제주도에 닿았다. 최영림은 섬에 제일 흔한 동물 중 하나인 말을 그리곤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윤두서가 그리던 미끈한 말이나 장승업이 그렸던 힘 넘치는 말이 아니라 고개 숙인 우울한 말이었고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기운을 내뿜었다. 전쟁 이후는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예술가로서 최영림은 이 때의 불안과 혼란스런 감정을 고스란히 그림에 담았다. 한국전쟁 이전의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그의 작품세계는 1950년대부터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전후(戰後)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품은 ‘흑색시대’의 작품은 어둡거나 짙은 청색이고 피카소로 대표되는 큐비즘과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장품 기획전 ‘내가 사랑한 미술관:근대의 걸작’전에서 이 시기 대표작인 ‘여인의 일지’를 만날 수 있다. 그림에는 조각조각 갈라진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어두운 가운데 황갈색과 붉은색, 청색이 은근하면서도 강한 대비를 이룬다. 1952년작 ‘여인’은 삼각형의 몸통 위에 둥근 얼굴이 놓인 여성의 목이 금세라도 끊어질 듯 아찔하다. 단순한 그림에 실존주의가 짙게 배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작가의 마음인 양 슬픈 상념과 애잔한 그리움이 일그러진 큰 눈에 그득하다.

최영림 ‘1950.6.25’ 1974년작, 캔버스에 유채와 흙, 144x96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1960년대 초기는 흙과 모래를 캔버스에 바른 다음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황토색 시대’로 불린다. 그의 그림 대부분이 누런 황토색을 가지는 게 직접 흙을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텁텁한 벽화 느낌이 나는 것도 그 덕이다. 최영림은 황토색 바탕 위에 벌거벗은 여체를 주로 그렸다. 머리는 기이하게 크고 복스럽게 둥글다. 머리만큼 도드라지는 가슴은 지나치게 풍만하다. 망설임 없는 왜곡과 과장이 넘친다. 벗은 몸이 모두 야한 것은 아니다. 최영림이 그린 나부는 이상향의 여인이다. 어머니요 아내이자 딸들, 즉 멀리 두고 만나지 못하는 아련함의 대상이자 머릿속으로 그리움만 터질 듯이 키워놓은 먼 세상의 여인들이다.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인 윤범모는 “최영림의 벌거벗은 여인은 단순히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 모성본능 혹은 망향정신이 스며 있다”고 했다. 전쟁, 실향, 이산가족, 평화에 대한 갈망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보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이후 최영림은 주변의 권유로 재혼하고 아들을 낳으며 화풍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그 시기와 맞물린 1960년대 후반부터가 ‘설화시대’로 불리는데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을 소재로 그렸다. 불교적 세계관인 ‘연화환생’을 주제로 한 그림도 여럿 남겼는데 그 속에도 역시 죽어서나마 다시 만날 것 같은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선의 사용이 유려하다는 점에서는 이중섭을, 흙을 섞은 질감에서는 화강암 같은 거친 표면을 추구한 박수근을 견줄 수 있다. 단순하게 따지자면 이중섭과 박수근의 특징적 장점을 합친 작가인 셈인데 최영림의 위상은 학계 연구도 부족하고 시장가치 또한 저평가돼 있다. 일본인으로 베니스비엔날레 최고상 수상까지 한 무나카타 시코에게 배워 영향을 받았다는 점,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호평을 받는 등 일찍이 두각을 나타낸 것이 어쩌면 최영림에게 일정 부분 약점이 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가정의 달,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맞아 그림처럼 단란한 시간 보내기를 바란다. 혹여 그 달콤한 끝에 잠시 눈 돌릴 틈 생기면 가족을 멀리 두고 만나지 못하거나 영영 헤어진 사람의 상처도 살짝 엿봐주면 좋겠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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