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반성하게 된다. 기계문명의 등장 앞에 인간 실존을 고민했듯 말이다. 종로구 우정국로 OCI미술관의 문을 여는 순간 다시금 그 진중한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 공장에서 일하는 인공지능로봇(AI)들이 높이 386㎝, 폭 259㎝의 큰 그림을 가득 채웠다. 사람 설 자리 없는, 머지않은 미래를 예고하는 것 같아 오싹해진다.
40년 이상 인간 실존과 소외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고뇌하는 사람’을 주로 그려온 화가 오원배(64·동국대교수)가 로봇을 그린 것은 처음 본 성 싶다. 오원배 특유의 인물상은 그 그림 바로 옆, 1층 전시장 벽 전체를 감싼 32m 폭의 그림에서 만난다. 아랫도리만 살짝 걸친 사람들이 너덧 명씩 무리 지어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다. 전체주의 병영이나 산업 현장에 유폐된 것 같은 군상이다. 기계의 동작을 취하는 인간의 몸짓은 역동적인 듯하나 괴로워 보인다. 기계화된 동작이니 인간에게는 물리적으로 어려운 자세이고, 획일적이고 반복적인 행위가 결코 행복할 리 없다. 근육을 꿈틀거려가며 애쓰는 인간의 몸뚱이가 앞서 본 그림 속 로봇의 매끈한 표면과 대조를 이뤄 측은하다. 이들이 왜 이러나.
“지난해 구글 알파고가 이세돌 8단에 완승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기계는 어디까지나 생산력 향상을 위한 편의적 존재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감성적 영역까지도 파고들었더군요. 일본 ‘호시 신이치’ 문학상에서는 AI가 쓴 소설이 예심을 통과했고 구글의 인공지능 ‘딥 드림’이 램브란트와 고흐 작품을 복제한 그림이 옥션에서 팔렸어요. 그 충격으로 그리기 시작한 작품들입니다. 기계가 단순업무를 대신하면서 잉여노동으로 불안을 느낀 인간이 기계의 획일적인 동작을 취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간의 ‘실존’ ‘인간소외’를 다룬 작업들이 개인의 문제였던 것과 달리 이번 주제는 “인간집단의 문제, 기계화된 인간 존재 자체”를 다룬 것이라 더욱 비장하다. 오 작가는 삭막하고 건조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손쉬운 튜브물감 대신 안료를 직접 개어 물감을 만든다. 녹슬어 붉은 갈색을 띠는 가스통은 철 가루를 섞어 색칠한 후 소금물을 발라 실제 산화시켜 색이 배어나게 했다. 공간의 단점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것도 인상적이다. 낮게 깔린 환풍구는 공장의 일부로 보이고 검은 벽에서 반짝이는 소화전의 붉은 등은 마치 인간을 감시하는 기계의 눈빛 같다. 동작만 있고 표정은 없는 인물들 사이로 노랑, 파랑 나비가 날아다닌다. 이 벽화 안에서 가장 생기있고 세부적으로 표현된 게 바로 이 나비들이다. 희망의 기호임이 분명하다.
2층 전시장에서는 텅 빈 공간들이 펼쳐진다. 인간 소외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를 추적한 결과다. 서대문 형무소의 잘 짜여진 붉은 벽돌건물, 압구정 고가 밑에서 본 빈 하늘, 내려가면 다시는 못 올라올 것 같은 계단, 심야의 광화문 뒷골목…. 가까이 실재하는 곳이지만 눈높이가 달라지니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3층에는 작가가 일기처럼 그려온 드로잉 37점이 걸렸다. 육계와 색계를 지나 천상계에 올라선 마냥 암울했던 기운이 걷혀 숨통이 트인다. 알록달록 구슬과 손가락, 부처, 산, 피라미드 등 작가의 일상적 소재가 펼쳐진다. 결국 피안의 세계는 우리네 삶 안에 있는가 보다.
한편 작가는 이번 개인전을 통해 최근 작고한 고(故) 이수영 OCI회장에 대한 애도를 드러냈다. 오 화백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배경을 OCI공장 답사 후 그리기도 했으나, 이 회장은 개인전 개막을 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12월 23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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