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출산
김일성과 김정숙은 빨치산 부하였던 최현의 소개로 1940년에 결혼했다. 최현은 그 뒤에도 김일성을 도왔고 아들 최룡해는 김정은을 보좌하고 있다. 정숙은 1941년 2월 16일 하바로프스크 근교 소련 극동군 88특별여단 숙영지에서 장남 김정일을 출산했다. 러시아식 이름은 유라(일부에선 유리). 북한은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이는 신격화를 위한 조작이다.
같은 시기에 출산한 이재덕이라는 여성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유라, 나중에 태어난 동생은 슈라로 불렸다”고 말한다. 정숙은 몸이 마른 체형으로 키도 작고 젖이 적었다. 그 때문에 정일은 배가 고파 우는 때가 있었고 이재덕이 정일을 건네받아 젖을 여러 차례 먹였다고 증언했다.
나라의 지도자가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풍의 어릴 때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은 특히 북한에선 수용하기 힘든 일이다. 정숙은 44년에 소련 브야츠크에서 차남 슈라를 낳았는데 나중에 연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정숙은 45년 11월 북한에 귀국해 정식으로 김일성의 아내가 되었고 46년 김경희를 출산했다.
허드렛일
채널A가 2014년 9월 10일 마이클 리(전 CIA 요원·한국계)와 인터뷰해 김정숙 신상에 대해 특종 보도했다. 리는 1958년부터 한국 주재 美 502정보군사단에서 근무를 시작해 CIA(美중앙정보국)에서도 1970년대 중반부터 24년간 북한 분석을 맡았고 이미 80세를 넘었다. 그는 정숙에 관해 근거도 밝히지 않은 채 가차 없이 입을 열었다.
그가 발설한 정숙은 “빨치산 활동을 하던 때 구만주의 야영지에서 빨치산 대원들의 옷을 세탁하고 연료를 넣어 불을 붙이는 하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키가 작고 얼굴이 거무스름해서 ‘검은 정숙’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아내는 맞지만 북한이 주장하듯이 전쟁터에서 활약한 것도 아니고 후방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항일투쟁 시기에는 헌신적인 정숙을 파트너로서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북한 지도자가 된 후로는 한글도 읽지 못하고 외모도 평범한 정숙과 소원해져 바깥 무대에는 일절 내세우지 않았다.
또한 리는 “김일성은 정숙이 죽기 직전까지 심하게 외면했다”고도 증언했다. 리뿐만 아니라 많은 탈북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리에 따르면 모친을 닮은 생김새로 키도 크지 않은 김정일은 “자기 용모에 강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영화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리는 이에 대해 “자기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김경희와 장성택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는 오빠의 전속비서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과 김경희의 결혼에 대해서는 황장엽이 자기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둘은 북한의 최고 학부인 김일성종합대학 경영학부 학생이었는데 황은 이 대학 총장이었다. 장성택은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예술서클 책임을 맡고 있었다. 황은 그를 아코디언 연주를 잘하고 노래와 춤도 뛰어나며 영리했다고 호평하고 있다.
둘이 교제한다는 소문이 돌자 김일성은 장성택의 가문을 뒷조사시켰다. 그 결과, 장성택 부친의 경력에 문제가 드러나 둘의 관계를 끊으라고 황에게 지시했다. 황은 “연애 중인 남녀를 강제로 갈라놓으면 한층 열이 오르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적당히 처리하는 척했다”고 쓰고 있다. 김경희는 황에게 와서 “왜 애정 문제에 간섭하느냐”며 반발했다. 황은 이때의 일을 두고 “경희가 성격이 꽤 까칠해서 오빠 김정일도 어쩌지 못한다”고 회고한다. 장성택은 원산에 있는 다른 대학으로 추방됐다.
그러나 고집 센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를 설득한 끝에 결국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둘은 대학 졸업 후 정식으로 약혼하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모스크바에 체류 중이던 1972년 김일성 60세 생일에 결혼한 뒤 이듬해 귀국해 당쪽 일을 했다. 장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지도원, 김경희는 국제사업부의 지도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장, 석탄증산으로 출세의 길
장성택은 조용히 능력을 발휘했다. 73년에 조직된 인민경제계획실행70일전투 캠페인에 참가해 가장 난제였던 석탄증산 문제를 맡았다. 석탄 생산이 활발했던 평안남도의 광산에 파견됐다. 장은 채굴장에 직접 가서 광부들과 함께 굴삭기를 손에 들고 석탄을 캤다.
장성택이 지도원으로 부임한 장소마다 생산량이 올랐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국가훈장 1급을 받았고 그 후에도 순조롭게 출세의 길을 걸었다. 청소년사업부 부장(88년), 청년 및 삼대혁명소조 부장(89년), 1992년 북한 최고영예라는 김일성훈장을 받고 95년에는 당조직지도부 1부장으로 ‘사실상 넘버 2’가 됐다.
횟수를 거듭하는 숙청과 복귀
그 중에 숙청도 있었다. 장성택은 2004년에 ‘권력욕에 따른 분파활동’을 했다고 비판받아 조직지도부부장 직위를 잃고 2006년에 복귀했다.
2010년 6월 북한최고인민회의(국회에 해당) 12기 3차 회의에선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 국방위원이 부위원장으로 승격됐다. 장은 전년 4월 국방위원에 막 선출된 터라 이례적 인선이 아닐 수 없다. 그 뒤 2011년에 인민군대장이 됐는데 이 직함만으로도 2인자의 지위를 굳혔다.
2011년 말에 김정일이 돌연 사망하자 30세도 안되는 김정은이 훅계자로 뽑혔다. 오랜 행정 경험이 있는 장성택은 이에 따라 북한 음지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지만 그 후 자기가 키운 처조카에게 숙청당하고 만다.
깔끔한 생김새
김경희를 만났던 사람은 의외로 많다. 김정일의 명령으로 한국에서 데려간 여배우 최은희가 그 중 한명.
김정일은 금요일마다 파티를 열고 최은희를 불렀는데 여기에 여동생 부부가 가끔 참석했다. 최은희는 어느 날 파티에서 김경희를 만났는데 “약간 과체중에 키는 160cm로 체격이 좋았다. 화장기 없는 둥근 얼굴에 눈은 시원하고 얼굴생김은 괜찮은 편이었다. 감색 투피스를 입고 머리는 보통 파마스타일이었다.”(‘어둠으로부터의 메아리’)
최은희는 장성택에게서 약간 여성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파티가 끝난 뒤 김경희의 집을 방문했다. 김경희의 비서가 “(김이)최근 둘째 아이를 낳았다”고 귀띔해 최가 김에게 축하를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장·김 부부에게는 장녀 외에도 아이가 한명 더 있는 셈이다. 김일성 주석이 59세 때 간호사와 사이에 얻은 ‘현’이라는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김정남의 이모인 성혜랑의 장남 이한영이 책에서 밝힌 에피소드다. 이 아이가 장성택과 김경희의 아들 장현으로 자랐다. 국가정보원은 2016년 7월 1일 국회 보고에서 김경희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남편 장성택의 처형 직후, 알코올 중독에 빠져 현재는 평양 교외에서 치료를 받고 심각한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고계연기자 kogy2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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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최근 한반도 정세(외교 안보 등)를 좌지우지하는 핵심인물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라 하겠다.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그리고 섬뜩한 말 폭탄 주고받기로 긴장과 전쟁 위기감을 키우는 두 사람. 이제는 ‘선전포고 주장’까지 나오는 일촉즉발 험악한 형국이다.
트럼프에 맞서는, 30대 초반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미치광이인가? 전략가인가? 그의 성장 과정과 인성 등을 들여다보고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을 분석·예측해보는 일본 언론인 고미요지(도쿄신문 편집위원)의 원고를 입수했다. 국내 판권을 가진 서교출판사 김정동 사장이 번역서 출간에 앞서 콘텐츠 사용에 대해 양해를 해줬다. 일부 수정을 거쳐 정기적으로 옮겨 싣는다.
* 고미 요지(五味 洋治) :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쥬니치신문 서울지국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총국에서 근무하며 북한 뉴스를 쫓아왔다. 올 2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7년 동안 주고받은 전자우편 대화록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으로 지난 2013년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도쿄신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6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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