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에 체류 중인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25일(현지시간) 예정에 없던 기자 회견을 열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가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이라며 “전세계는 이번에 미국이 먼저 우리에게 선전포고 했다는 걸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최근 북미 간에 오고 간 수위 높은 말 폭탄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기 위한 여론몰이 성격인 것으로 풀이된다. 더불어 지난 23일 밤 미국의 전략 폭격기 B-1B가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데 대해서도 미국이 먼저 ‘실제 위협’을 가했다는 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며, 향후 북한의 무력 도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리 외무상은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이상 미국 전략폭격기들이 설사 북한 영공을 채 넘어서지 않는다 해도 모든 자위적 대응권리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긴 후 귀국길에 올랐다.
리 외무상은 지난 8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당시에만 해도 기자들 앞에서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기자 회견 등을 통해 선전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됐었으나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에 대한 반응이 예상 이상으로 싸늘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당시 수행원을 통해 소감문 하나만 남긴 채 출국했었다. 지난 해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ARF에서 10분 넘게 기자 회견을 하며 북한 핵 보유의 정당성을 강조했던 것과는 완전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번 뉴욕 방문 중에는 다시 적극적인 대응으로 자세를 바꿨다. 3일 6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 정권의 생명줄과 같은 유류까지 포함한 새 대북 제재를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한 대북 비난 어조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직접 겨냥하는 수준까지 도달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재차 김 위원장을 ‘로켓맨(Rocket Man)’으로 지칭하며 “로켓맨은 그와 그의 정권에 대한 자살 미션을 하고 있다”는 노골적인 말로 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방미길에 올랐던 만큼 리 외무상은 적극적인 맞받아치기 전략에 나섰다. 그는 입국 첫날인 20일 기자들에게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구절인 “개는 짖어도 행렬은 나간다”를 인용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기조연설을 “개소리”라고 맞불을 놓았다.
이어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는 다시 한번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투전꾼’ ‘악(惡)의 대통령’ 등의 폭언을 작심하고 쏟아부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트럼프대통령이 연일 쏟아내고 있는 대북 강경 발언에 맞서 지난 21일 직접 성명을 내놓은 데 따른 후속 대응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가 세계의 면전에서 나와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모욕하며 우리 공화국을 없애겠다는 역대 가장 포악한 선전포고를 해온 이상 우리도 그에 상응한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 단행을 심중히 고려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 정권의 최고 지도자가 전례 없는 직접 성명을 통해 대북 결전을 선언한 이상 리 외무상이 김 위원장의 성명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국제 사회에서 더 크게 내는 게 수순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조연설에서 “미국과 그 추종세력이 우리 공화국 지도부에 대한 참수나 우리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공격 기미를 보일 때는 가차 없는 선제행동으로 예방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편 북한 내부에서는 국제 사회의 냉랭함과 경제적 압박에 맞서 내부 결속 다지기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주말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10만 군중 대집회를 여는 등 김 위원장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평양의 기름값이 급등세를 보이기 시작한 가운데 다음 달 1일 중국이 대북 석유제품 수출 제한에 본격 착수하면 북한 내부 분위기를 예단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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