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위에 붙였던 반창고를 떼어 낼 때의 고통은 처음 상처가 생겼을 때 못지 않다. 마치 살점이 떨어져 나가듯 눈물이 찔끔 날 정도다. 이 고통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라면 솜씨 좋은 사람들 상당수가 묘사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에는 그 촉감까지 또렷하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두 손에 A4용지와 펜뿐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 그림(①)을 보자. 종이를 조금 찢어 올렸을 뿐인데 따끔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종이를 들어 올린 저 손이 얄미울 정도다.
A4용지와 펜 한 자루로 이 같은 기발한 3D 드로잉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는 작가의 정체는 후스크밋나운(Husk Mit Navn). 덴마크어로 ‘내 이름을 기억해줘(remember my name)’라는 의미의 익명 예술가인 후스크밋나운에 대해 알려진 것은 덴마크의 공공예술가이며 소셜미디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후 유럽 굵직한 갤러리의 주요 초청 인사가 된 인물이라는 정도다. 그런 그가 최근 국내에서 ‘종이인간(paperman)’(북레시피 펴냄) 이라는 제목의 화보집을 냈다. 제목 그대로 페이지마다 후스크밋나운의 손 끝에서 생명력을 얻은 종이 인간들이 살고 있다.
넘실대는 파도를 가르며 수상스키를 즐기고(②) 빗길을 걷다가 벼락을 맞는가 하면(③)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른다(④). 누군가 뒷주머니 휴대폰을 빼들려 하자 화들짝 놀라고(⑤) 세탁기에서 세탁물을 꺼낸다(⑥). A4용지와 펜 한 자루로, 찢고 접고 구기는 단순한 작업만으로 살아 숨 쉬는 캐릭터들을 보다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조물주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이메일을 보내자 하루 만에 솔직담백한 답이 왔다.
인스타그램(▶바로가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갤러리에만 머무는 예술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고 단언했다. 예술의 빗장을 풀어버린 이 탈권위주의자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누구든 모방할 수 있는 예술을 하는데 두려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누구든 내 그림을 따라 하고 공유해주길 바란다”고 답했다. 이번 책 ‘종이인간’은 후스크밋나운의 초대장인 셈이다. 답장 말미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빨리 동참하길 바란다. 더 기발한 아이디어도 기다리고 있다.”
△후스크 밋 나운은 어떤 의미인가.
“‘내 이름을 기억해줘’라는 의미다. 익명으로 일하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 있다. 머리 스타일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다. 2000년쯤에 나는 아트 포스터를 잔뜩 만들어서 코펜하겐 거리 곳곳에 붙였다. 당시 사람들이 포스터를 떼어다가 자기 집 거실에 붙여놨는데 그때 포스터에 내일은 없어(gone tomorrow)와 후스크 밋 나운을 적었다. 그때부터 후스크밋나운이 내 이름이 됐다.”
△SNS에서 상당히 유명한데
“소셜 미디어는 아티스트에게 엄청난 힘을 준다. 더 이상 어떤 갤러리(혹은 박물관)에서 내 작품을 보여줄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몇 초만에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내 작품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요’와 긍정적인 댓글을 받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좋아요’를 받는 게 예술의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결국 내가 어떤 예술을 하고 싶은지가 명확해야 할 것이다.”
△당신 작품의 주된 주제의식은 뭔가.
“내 주변에서 주로 영감을 받는다. 내 삶은 지극히 평범하다. 대신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주로 활용한다. 보통 3D 드로잉 작업은 30분 내지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TV에서 어떤 장면을 보고 빠르게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예술을 정말 진지하거나 추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전시회에 가서 웃고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삶은 항상 진지하거나 항상 추상적이기만 하지 않다. 오히려 웃기고 재미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예술도 우리 삶의 한 단면은 반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술로 좀 더 재미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초기 작품은 주로 벽화나 설치미술 등 대형작품이었는데 지금은 크기가 상당히 줄었다.
“초기에는 벽화나 대형 설치 미술 작품을 주로 했다. 지금도 물론 하고 있다. 내가 A4 용지를 활용한 3D 아트를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식탁에 앉아 A4 용지에 우주인을 그리고 있었는데 문득 종이 접기 드로잉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작은 종이 조각으로 작업하는 건 언제든지, 어디서나 할 수 있고 3D로 구현하는 데도 용이하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나.
“나는 9년간 덴마크 최대 신문에 주간 카툰을 연재했다. 당시 내 주변의 세상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지 꾸준히 고민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거리를 걸으면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뭐 먹을지 이런 고민을 하겠지만 나는 걸으면서 보는 일상의 풍경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보통 최고의 아이디어는 눈 앞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당신이 보고 있는 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데서 시작해보면 좋겠다.”
△지금까지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만 꼽는다면
“나는 단순한 작품을 선호한다. 그 중 하나가 ‘연 날리는 소년’(⑦)이다. 종이 한 번 접었을 뿐인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생긴다. 복잡한 예술은 오히려 쉽다. 캔버스 위의 그림은 언제든지 다른 물감을 덧칠해 바꿀 수 있지 않나. 오히려 단순한데 정곡을 찌르는 작품은 훨씬 만들기 복잡하다. 몇 줄만 그려도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단순한 아이디어의 작품에 가장 만족하는 이유다.”
△당신 작품은 모방하기 너무 쉽다.
“내가 책을 낸 이유가 바로 그거다. 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다. 독자들이 내 그림들을 보고 바로 따라서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자기만의 작품과 아이디어가 나오게 될 거다. 내 책은 뽐내기 위해 만든 게 아니다. 동참해라. 나는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그의 최신작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감상할 수 있다. 아래는 최근에 소개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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