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9년 뒤인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028260)의 합병을 앞두고 돌연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합병 반대를 외치며 깜짝 등장했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한 엘리엇은 기업이나 국가의 약점을 파고들어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것으로 잘 알려진 헤지펀드다. 우여곡절 끝에 소액주주들의 도움으로 합병에 성공했지만 삼성은 한때 합병 무산 위기까지 내몰리며 큰 홍역을 치렀다.
한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톱 10’ 수준까지 커졌지만 국내 대표기업들이 외국계 투기자본의 공세에 휘둘리는 일은 수십 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국가 경제와 기업의 외형 성장과 달리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맞설 수 있는 경영권 방어 장치는 취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기업들의 마지막 경영권 방패마저 빼앗으려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기업 분할 시 자사주의 신주배정을 금지하자는 법안이 대표적이다.
◇지주회사 전환 가로막는 반시장적 법안= 현재 야당이 추진하고 있는 상법개정안 중 자사주 처분 규제를 강화하자는 법안은 법적 안정성과 정책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이미 지난 2011년 정부는 기업의 경영권 방어와 대기업의 지주사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 자사주 취득을 허용하고 처분 규제를 삭제한 바 있다. 하지만 야당은 시계를 거꾸로 되돌려 인적분할 시 신설법인의 자사주에 대해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 분할 시 자사주의 의결권이 되살아나는 것을 이용해 대주주의 지배력을 높이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사실상 국내 기업의 유일한 경영권 방어수단인 자사주까지 규제하면 언제든 투기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외국에 비해 기업의 경영권 방어수단이 취약한 우리나라에서 자사주는 대주주의 경영권 안정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자사주의 의결권을 제한할 경우 국내 기업들은 해외 투기 자본의 적대적 M&A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도입한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필 등 적대적 M&A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하다. 반면 미국의 포드는 7%의 지분을 보유한 오너 일가에게 40%의 복수의결권을 주고 있으며,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20%의 지분으로도 60%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를 갖고 있다.
자사주 규제 강화는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대기업들이 추진 중인 지주사 전환 작업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법이 개정돼 자회사의 자사주 이전 없이 지주사 스스로 자회사의 지분을 취득하기 위해선 천문학적 비용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과 현대차(005380), 롯데 등 지주사 전환을 준비해온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재계 관계자는 “김대중 정부 이후 순환출자 해소 차원에서 정부는 일관되게 기업들의 지주사 전환을 유도해왔다”며 “자사주 규제를 강화해 지주사 전환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정부 정책만 믿고 따라온 기업들을 배반하는 반시장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다수결 원칙과 세계적 흐름에도 역행= 야당의 상법개정안 중 논란이 되는 또 다른 법안은 집중투표제 의무화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임할 때 특정 이사 후보에게 투표권을 몰아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는 ‘1주 1의결권’이라는 자본 다수결의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도입 취지와 달리 지분율이 낮은 헤지펀드들이 악용할 가능성이 높다. 칼 아이칸이 KT&G 이사회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던 것도 집중투표제 덕분이었다. 결국 마땅한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없는 기업들에게 집중투표제까지 의무화할 경우 투기 자본들이 자신이 뽑은 이사를 동원해 경영 안정성을 해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다. 때문에 현재 전 세계에서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는 칠레, 멕시코, 러시아 등 3곳에 불과하다. 1940년대까지 22개주에서 집중투표제를 실시해오던 미국은 현재 5개주로 줄었고, 일본은 1974년부터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를 배제할 수 있도록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주요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과잉 규제”라며 “회사의 경영정보가 유출되는 것은 물론 주주총회장이 주주 간의 싸움터로 변질될 가능성도 높다”고 우려했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