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9년 2월3일, 인도 서북부 디우(Diu)지역과 인접한 아라비아해. 포르투갈이 보낸 함대와 인도·이슬람 연합함대가 인도양의 패권을 놓고 승부를 펼쳤다. 외형적인 전력에서 연합함대는 포르투갈을 압도했다. 인도 캘리컷과 구자라트 지방의 술탄과 이집트 맘루크 왕국이 동원한 함선은 100척이 넘었다. 포르투갈이 동원한 전력은 달랑 18척. 병력 수도 5,000여명 대 1,700명(포르투갈 1,300명, 힌두교 코친 지원병 400명)으로 이슬람측이 훨씬 많았다.
이슬람 연합함대는 승리를 굳게 믿었다. 1년 전 차울(Chaul) 해전에서도 기습을 가해 포르투갈 함대를 물리친 승리 경험도 있었다. 이슬람 함대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원은 물론 이탈리아 도시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기술과 정보까지 넘겨받았다.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포르투갈은 바다뿐 아니라 간헐적으로 전개된 지상 전투에서도 이슬람 군대를 쉽게 꺾었다. 이슬람은 왜 포르투갈에 졌을까. 무기의 질이 승부를 갈랐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의 함선 성능이 앞섰다. 포르투갈은 18척 가운데 12척이 대포를 양쪽 측면에 설치할 수 있는 대양항해용 카라크(carrack), 나머지 6척은 카라크보다 작지만 빠른 카라벨(caravel)이었다. 반면 이슬람 연합함대 100척 중에 전투용 함선은 갤리(galley)선 12척에 불과했다. 파도가 낮고 잔잔한 지중해에서 주로 운용되던 갤리선은 노를 저어 항해할 때 빠른 속도를 자랑했으나 대포를 선수에 3~4문 싣는 게 고작. 화력에서 양쪽의 차이가 워낙 컸다.
이슬람 연합함대의 나머지 선박들은 인도양에서 상선으로 쓰던 다우(dhow)선으로 조작하기 쉬운 반면 크기가 작은데다 대포를 적재할 수 없었다. 선박의 한계 탓으로 연합함대의 전술은 단순했다. 갤리선으로 빠르게 적선에 접근해 화살 공격을 퍼붓거나 들이받은 후 선상 백병전을 치르는 방식에 매달렸으나 통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함선의 높이가 높아 아래에서 위로 쏘는 화살의 위력이 약한 데다 접근하기 전에 대포에 당했다. 군사전문 저술가인 윌리엄 위어의 저서 ‘세상을 바꾼 전쟁’에 따르면 사흘간 이어진 전투에서 포르투갈의 인명 손실은 불과 30명. 반면 이슬람의 사망자는 최소한 1,500명에 이르렀다.
동원된 함선과 병력, 희생자 수만 본다면 디우 해전은 규모가 작은 전투에 속한다. 그럼에도 윌리엄 위어는 디우 해전을 ‘세계를 바꾼 50개 전투’의 하나로 꼽았다. 동서양 교류와 경제사 측면에서 보자면 디우 해전의 의의는 더욱 깊다. 동양과 서양이 맞붙었던 그 어떤 전쟁보다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까. 레판토해전(1571·유럽 기독교국가들의 신성동맹 함대가 오스만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해전)보다 디우 해전에 더 무게를 두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왜 그럴까. 서양의 해양세력이 동양을 압도하는 전환점이었기 때문이다. 동양보다 뒤졌던 유럽의 경제력이 앞서 나가기 시작한 분기점이기도 하다. 전쟁의 진짜 원인은 후추와 비단 등의 교역권을 둘러싼 갈등. 디우 해전에 참전한 이슬람 연합함대의 구성을 보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이슬람 세력간 연합을 가장 먼저 주장한 캘리컷은 중계무역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중국 비단과 도자기, 인도네시아·인도의 각종 향신료가 1차로 모이는 집산지였다.
캘리컷은 교역품을 모아 이집트와 오스만제국으로 재수출했다. 이집트와 오스만은 비단과 향신료를 베네치아에 넘겼다. 베네치아가 유럽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이슬람 편을 들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귀한 동양 물품 교역 독점권을 위협받는 경제 위기 상황이 종교와 인종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포르투갈도 천신만고 끝에 개척한 동양 항로에서 직교역을 추진하다 캘리컷이 반발하자 대규모 함대를 보냈다. 포르투갈이 집요하게 매달렸던 교역품은 후추였다. 요즘 1만5,000원 어치의 후추가 유럽에서는 좋은 집 한 채에 해당하던 시절, 포르투갈은 후추 교역권 확보에 국운을 걸었다. 디우 해전은 동서양의 무역 전쟁이었던 셈이다.
디우 해전 이후 인도 서해안의 토후국들은 친 포르투갈로 외교 노선을 변경하고 이집트를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의 권위도 크게 떨어졌다. 힘이 약해진 맘루크 왕조는 디우 해전 8년 뒤인 1517년 오스만투르크에 정복 당해 속령으로 떨어졌다. 오스만투르크는 1538년과 1547년 직접 대규모 함대를 디우에 내보내 포위전을 펼쳤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인도양의 제해권은 포르투갈로 넘어갔다.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100년 넘게 약진하는 출발점이 바로 디우 해전이었다. 만약 디우 해전에서 포르투갈이 졌다면 일본에 이르지도, 조총 전래도 발생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디우 해전이 역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유럽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보급마저 여의치 않은 이역만리의 해전에서 소국(小國) 포르투갈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들뜬 유럽 각국은 배를 동쪽으로 보내 대항해와 침탈의 시대를 열었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의 저작 ‘문명과 바다-바다에서 만들어진 근대’에 따르면 ‘떠다니는 폭력, 그 자체였던 유럽의 선박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해역이던 인도양에 등장한 사건은 강력하고 체계적인 폭력의 세계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서구가 주도한 폭력의 시대는 과거형일까. 국제질서 유지란 미명 아래 요즘도 지구촌에서는 아이들과 난민들이 죽어간다. 인도양의 재해권과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가공할 폭력을 구사하던 포르투갈과 ‘항공모함 같은 치명적 무기를 든 현대의 비즈니스맨’은 508년 시차가 무색할 만큼 닮은 꼴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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