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김학순 할머니의 1997년 마지막 인터뷰
“잊으세요! 그리고 용서하세요. 조국도 관심 없는 과거를 당신들이 들춰내 뭐하겠다는 거요? 당신이 받은 고통을 나와 내 손녀에게 퍼붓지 말아요!... ”미쳐야 진실을 밝힐 수 있다면, 미칩시다!” “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그린 2005년 연극 ‘나비’ 중에서
‘일본군위안부(日本軍慰安婦)’는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욕 해결의 대상이 된 한국·대만 및 일본 여성이라고 정의된다. 전쟁을 위해 동원된 성노예나 다름 없었던 ‘위안부’는 하루에 25-3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소녀들이었다. 수십 년간 일본정부는 2차 세계대전 동안 20만여 명에 달하는 여성들을 강제로 성적노예로 만든 사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왔다.
책임 전가의 1일자였던 일본 정부는 2015년 12월, ‘위안부’ 피해자 지원용으로 10억 엔을 내놓는 것으로 ‘위안부’ 문제가 불가역적·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했다.
▶ 일본이 전격적으로 해치워버린 합의 아닌 ‘강제’
한일 ‘위안부’ 졸속 합의가 연일 이슈가 되고 있는 가운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및 연극이 연달아 개막한다. 사실 꽃다운 나이에 강제로 끌려가 끔찍한 고통을 겪은 소녀들에서 이제 구순을 넘긴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및 공연은 수차례 세상에 나와 관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통해, 과거의 ‘아픈 역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인 ‘폭력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매 작품이 의미 깊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소재로 한 첫 번째 극영화이자 한국과 중국의 합작 영화 ‘소리굽쇠’(감독 추상록)가 2014년 국민들의 ‘위안부 문제’ 관심을 촉구했으며, ‘나눔의 집(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 봉사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배경으로 써 내려 간 2016년 영화 ‘귀향’(감독 조정래)은 전국민의 참여로 상영관이 확대된 영화로 기록됐다. 특히 개봉 24시간 만에 20만명을 돌파한 ‘귀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끌려간 20만 명의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여서 더욱 소중한 의미를 더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겪은 참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움직임은 문화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공연계에선 199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하나코(HANAKO)’란 제목으로 일본인 밀집 지역인 리틀 도쿄 등에서 공연된 연극 ‘나비’(연출 방은미)가 신호탄을 쐈다. 2004년에는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져 화제가 된 것에 이어 2005 서울연극제 개막작으로 국내 무대에 첫선을 보였다. 이후에도 악극 ‘꿈에 본 내 고향’(연출 유승봉), 연극 ‘반쪽으로 날아온 작은 새’(연출 김경미), 이어 최근엔 ‘빨간시’(이해성), 故심달연 할머니의 일생을 담아낸 ‘꽃 할머니’(연출 송인현), ‘꽃잎’(연출 이강선), 모노드라마 <페이스>(Face, 연출 김혜리)까지 계속 공연되고 있다.
▶역사의 폭력에 뭉개진 할머니들의 현실은 더욱 잔혹했다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 20여만 명, 한국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 239명, 국내 생존자 39명” 아픔의 생존자는 갈수록 줄어들지만 체감되는 고통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군수물자’ 혹은 ‘공중변소’로까지 기록하고 있는 일본측은, NHK 언론등을 통해 “일본 정부의 출연금 지급이 완료되면 한일 협정에 따른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은 완수된 것”이라고 공표하기에 이른다.
2015년 ‘한일 위안부 졸속 합의’ 이후 일본 정부의 소녀상 철거 요구와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불명확하고 이상한 태도는 부끄럽고 굴욕적 역사로 다시 한번 기록됐다.
할머니들은 여전히 매주 거리로 나서 일본의 전쟁범죄 인정과 공식사죄를 외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싸워온 ‘공식사과’의 길은 멀기만 하는 걸까?
▶ 합의 이전에 ‘예의’ ...“사과 한 번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오는 3월 국내 개봉하는 영화 ‘어폴로지’(The Apology, 감독 티파니 슝)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담아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제목 또한 ‘사과’라는 의미의 ‘어폴로지’이다. 과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길원옥 할머니는 “사과를 한다고 그 상처가 없어집니까? 아니죠. 상처는 안 없어지지만 마음은 조금 풀어지니까. 그 날을 기다리고 있죠.”라고 말한다.
‘어폴로지’는 진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과 타인의 비극을 바라보는 제 3자의 폭력적인 시선도 함께 담아낸다. 영상 초반에 등장하는 일본 우익단체들이 길원옥 할머니를 향해 쏟아 붓는 욕설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울분과 설움을 토로하게 만드니 말이다.
다음 달 7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공간 아울에서 공연하는 ‘하나코’(연출 한태숙)는 막연한 슬픔이 아닌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가슴 깊이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연극.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입증시켜야만 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적 측면, 사과 받아야 할 사람이 사과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리며 호평을 이끌어냈다. 또한 2015년 초연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뼈아픈 성찰을 이끌어내며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한 연극이다.
역사 속 ‘위안부’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인권, 여성, 평화의 문제로 인류의 공동선 추구를 위하여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이 시대의 과제이다.
미처 다 자라지도 못한 소녀들의 순결과 꿈은 처참히 짓밟혔다. 더더구나 그들은 가족에게서조차 버림받았다. 그도 아니면 가족에게조차 숨기고 살아가야 했다. 그들의 역사는 상상 이상의 아픔을 선사한다. 역사가 단순히 한탄과 비난만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기 위해서는 함께 밝은 세상 속으로 걸어나와야 한다. 슬픈 역사의 ‘도돌이표’ 변주곡이 울리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이 시점에서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월 아베 신조 일본총리는 NHK 프로그램 ‘일요토론’에 출연해 “일본은 우리의 의무를 실행해 10억 엔을 이미 거출했다. 한국이 제대로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이 양국의 합의를 정권이 바뀌어도 실행해야 한다. 이는 국가 신용의 문제다.” 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접하고 ‘국가 신용의 문제’라고 못 박기에 앞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먼저 보여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말을 힘주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건 본인 뿐 만이 아니었으리라.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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