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군 대장 처단을 시도하는 등 독립투쟁에 앞장선 추산 김익상 선생이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선생은 1922년 3월28일 상하이 황포탄부두에 도착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총탄을 발사했지만 빗나갔고 폭탄마저 불발돼 거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의거 직후 선생은 피신하다 붙잡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수감됐다가 나가사키로 이송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한편 몽골에서 의술을 펼치면서 독립운동을 도운 대암 이태준(1883~1921) 선생이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경남 함안 출신으로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안창호의 추천으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외곽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체포 위기에 처하자 중국을 거쳐 몽골로 망명했다. 선생은 몽골 고륜(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열어 근대적 의술로 몽골인들을 치료했고 곧 명성을 얻어 황제 주치의가 됐다. 몽골과 중국을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 등의 편의를 제공했고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몽골을 점령한 러시아 백위파(러시아 혁명 반대세력) 대원에 의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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