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존재였다. 전쟁터의 여인이란. 가족을 잃고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에게로 옮겨가야 했던 전리품. 비극을 떠안은 패전국 여인들의 한(恨) 서린 이야기가 창극으로 찾아왔다.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하겠다.” 연출의 말대로였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장식을 걷어내고 오롯이 소리로 무대를 꽉 채웠다. 싱가포르 연출가 옹켄센은 기원전 1350~1100년의 트로이-그리스 전쟁 이야기를 한국적인 그릇에 담기 위해 많은 것을 비우고 소리에 집중했다. 비극을 떠안은 채 남겨진 여자들은 자기 앞에 놓인 암울한 현실에 괴로워하며 저마다의 사연과 감정을 노래한다. 적장의 첩이 되어야 하는 공주 카산드라, 남편과 아들을 죽인 원수의 아들과 결혼해야 하는 안드로마케, 그리고 카산드라의 어미이자 안드로마케의 시어머니요 남편·아들·손자를 잃고 노예로 팔려갈 처지의 여왕 헤큐바까지. 이들의 노래는 대금·아쟁·거문고 등 배역 별로 지정된 악기를 통해 저마다 다른 결의 한을 담아낸다. 트로이전쟁의 원흉이 된 미모의 헬레네를 남자 단원 김준수가 연기하고, 그를 대변하는 악기 또한 국악기와 대조적인 피아노로 설정한 점도 인상적이다.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는 미니멀리즘이다. 양옆 계단과 가운데 구조물이 세트의 전부다. 하얀 무대와 상복을 연상케 하는 배우들의 흰 의상 위로 파도, 태양, 구름, 우주의 영상이 투사되며 인물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렇게 군더더기는 덜어내고 그 자리를 오롯이 소리에 내어 주었다. 조미료 없이 선보이는 판소리 본연의 맛과 멋에 감동은 절로 따라온다.
음악의 힘, 그 힘을 받아내는 국립창극단 단원들의 열창은 단연 돋보인다. 명창 안숙선과 피아니스트 정재일이 만들어낸 음악은 최상의 악기인 배우들의 목을 타고 수시로 관객의 눈시울을 적셨다. 특히 헤큐바 역의 김금미는 피맺힌 절규와 깊은 소리로 광기에 가까운 연기를 선보이며 여왕의 카리스마는 물론이요 가족 잃은 여인의 처연함, 신에 배신당한 인간의 분노를 표출했다. 신을 향해 ‘불멸의 신들도 우리처럼 죽게 될 것’이라며 오열 섞인 저주를 퍼붓는 장면에선 객석도 숨죽인 채 그녀의 아픔에 빠져들었다. 노예 실은 배가 그리스로 출항하기 전 헤큐바와 트로이의 여인들이 무대 상단에 올라 ‘우리는 트로이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비장하고 먹먹한 마지막 장면이 암전과 함께 지나가면 그제야 억눌렸던 박수가 터져 나온다.
특별한 시간도 마련돼 있다. 안숙선은 15·20일 고혼(孤魂) 역으로 출연하고, 정재일은 전 회차 무대에 나와 창극 속의 피아노 선율을 들려준다. 11월 2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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