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속담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단 이야기가 있다. 말 그대로 날 때부터 부모의 혜택을 받았다는 뜻이다. 패러디에 강한 한국 네티즌들은 은수저뿐만 아니라 금수저, 동수저에 ‘흙수저’까지 ‘계급’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흙수저란 말 그대로 부모로부터 돈 한푼 물려받을 가능성 없이 제 힘으로 보통 또는 그 이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흙수저’란 표현은 심리적인 박탈감을 가중시키는 것 같아 한편 우려스럽다. 하지만 네티즌들 사이에선 이미 대단한 유행어가 됐다. ‘흙수저’라는 단어를 곱씹고 되뇌일수록 좌절감만 깊게 자리 잡는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참 미래를 꿈꾸어야 할 젊은이들이 ‘흙수저’란 말로 인해 열패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다니. 심지어 열심히 살아가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며 냉소하는 세태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이란 개념을 이야기했다. 자신의 경제사회적 지위에 따라 문화 소비 패턴이 달라진다는 이론이다. 부르디외의 관점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흙수저’는 장당 5만원이 넘는 뮤지컬 티켓은 고사하고 1만원 남짓한 영화표도 부담스럽다. 그뿐이 아니다. 고학력 사회에서 ‘능력이 없으면’ 가는 것으로 비치는 대학원도 그림의 떡이다. 미디어에서 연일 떠들어대는 문화 콘텐츠 산업의 성장과 교육의 과밀화 현상은 ‘그들’에겐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필자가 중산층 정도에 속할 듯한 주변 지인들에게 ‘본인은 어떤 수저에 속한다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10명 중 6명꼴로 ‘흙수저’라고 대답했다. 그중 한 ‘흙수저’ 대학교수는 “지금 당장은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전문직이지만, 나날이 가중돼가는 전세 담보 대출이 걱정된다”고 답변 이유를 설명했다. 더 고약한 것은 이 ‘흙수저’ 교수가 “동료들에게 내 자신이 은수저 또는 금수저처럼 비쳐질 수 있도록 무진 노력을 한다”고 털어놨다는 점이다. 주변에 온통 금수저, 은수저밖에 없으니 가랑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수준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항변인 셈이다. 이처럼 ‘수저 계급론’은 혼란스럽다. 중산층 정도에 속할 듯한 대학교수가 스스로는 ‘흙수저’라고 여기면서 밖으로는 ‘은수저’나 ‘금수저’ 흉내 내기에 급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만 보면 흙수저 논란은 사실상 얼마 정도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어느 정도인지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정신적 회계(mental accounting)’에 입각한 건 아닐까.
얼마 전 ‘1인분의 삶’이란 책을 읽었다. 작가 김리뷰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막노동, 웨이터 등의 일당으로 연명해 가며 살아왔던 자신의 지난 삶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힘겨운 일상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녹아 있는 김리뷰 작가의 글을 접하면서 독자들은 “나만큼 힘든 사람이 있구나” 위로 받고, “함께 힘내자”며 의지를 다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누군가는 감정을 후벼 파며 자기주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부디 기우이길 바라지만 차별, 계급만큼 대중을 분노케 하는 건 없으니 대중을 선동할 기회만 노리는 불순한 정치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임이 분명해 보이니 말이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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